톱 1687 마루타 생체 실험 새로운 업데이트 41 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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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전 오늘, 일본군 731부대 생체실험 사진이 처음 공개됐다

이 사진은 중국 하얼빈 옛 731부대 터에 자리 잡은 소장품 가운데 일부다. 박물관 쪽의 협조를 얻어 국내에 반입됐다. 공개된 사진에는 하얀색 방호복을 갖춰 입은 731부대원들이 무리 지어 있다. 이들은 ‘마루타’를 수북이 쌓아놓고 페스트균과 콜레라균 등을 주입하거나 인체 장기를 해부하는 등 온갖 만행을 일삼은 장면도 담겼다. 특히 임신부와 아기를 해부하고 있는 사진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는 그동안 야사처럼 떠돌던 ‘생체실험 전체의 과정이 일체의 마취 없이 이뤄졌다’던 일부 가해자의 증언과 폭로 수기 문서의 기록이 사실로 입증되었다는 걸 뜻한다.

이런 가운데 당시 731부대원들이 전쟁 범죄에 대한 처벌을 받기는커녕 일본 사회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하나씩 밝혀졌다. 731부대의 생체 실험책임자였던 의학자는 당시의 실험 결과를 일본의 의학지에 자랑스럽게 소개했음이 밝혀져 물의를 빚기도 했다. 문제의 의학자는 라는 제목의 731부대의 연구 결과 발표에서 8살~84살의 일본인, 중국인, 몽골인 등 500명을 대상으로 동상에 대한 업종별 저항성을 조사했다고 밝혔다. 이 의학자는 “생후 3일된 신생아에 대해서도 한랭에 대한 피부혈관의 반응이 관찰됐다”고 말해 충격을 안겼다.

731부대의 만행이 처음 드러난 발단은 1981년 일본 교수가 쓴 논문이었다. 일본 국립 나가사키 장기대학의 쓰네이시 케이이치 조교수는 1981년 5월 란 제목의 연구서를 통해 731부대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밝혀냈다. 쓰네이시 교수는 “세균전 전문부대인 731부대가 유행성출혈열을 세균전에 이용하기 위해 많은 한국인과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인체실험까지 한 뒤 이들을 모두 독살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731부대의 인체실험 방법까지 상세히 기술했다. 보고서가 밝힌 실험 방법은 아래와 같다.

14 thg 8, 2018 — 공개된 사진에는 하얀색 방호복을 갖춰 입은 731부대원들이 무리 지어 있다. 이들은 ‘마루타’를 수북이 쌓아놓고 페스트균과 콜레라균 등을 주입하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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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전 오늘, 일본군 731부대 생체실험 사진이 처음 공개됐다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

[역사 속 오늘] 24년 전인 1994년 8월14일

일본군 731부대 생체실험 장면 국내 첫 공개 보도

‘끝나지 않은’ 일본군 731부대 인간생체실험 잔혹사

1992년 4월 15일 치.

일본(관동)군 731부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가와 중국 전쟁 포로 등을 대상으로 인간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아울러 해당 지역 주민에게는 콜레라, 티푸스, 페스트 등 강력한 전염세균 폭탄 투하 실험도 벌였다.

당시 731부대가 잡아들인 전쟁 포로는 세균전용 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실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731부대는 생체실험 대상자를 가리켜 이른바 ‘마루타’라고 불렀다. ‘마루타’는 일본말로 ‘껍질 벗긴 통나무’라는 뜻이다. 이 섬뜩한 단어는 이들에게 일종의 암호로 통했다.

일본은 만주지방에 특수세균전을 위한 731부대를 세웠다. 이때 전쟁포로 등을 대상으로 각종 생물무기 인체실험을 벌였다. 자료 사진.

731부대의 잔학한 만행은 1940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1945년까지 5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희생된 ‘마루타’만 3000명. 이들 가운데 살아나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공중에서 살포한 세균전으로 인한 피해자도 수만 명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31부대의 만행이 알려지기까지는 4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마저도 일부만 밝혀졌다. 여기에는 731부대를 비롯한 일본군 관계자와 일본 정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나라들의 조직적인 증거 은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의 책임 회피는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회피할 수 없는 증거들

1994년 8월 14일 치.

마침내 눈으로 확인한 전쟁 범죄의 만행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혹했다. 오늘로부터 24년 전인 1994년 8월14일, 일본군 731부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생체실험을 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이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중국 하얼빈에 남아 있는 옛 731부대 동력실 건물 잔해. 자료 사진.

이 사진은 중국 하얼빈 옛 731부대 터에 자리 잡은 소장품 가운데 일부다. 박물관 쪽의 협조를 얻어 국내에 반입됐다. 공개된 사진에는 하얀색 방호복을 갖춰 입은 731부대원들이 무리 지어 있다. 이들은 ‘마루타’를 수북이 쌓아놓고 페스트균과 콜레라균 등을 주입하거나 인체 장기를 해부하는 등 온갖 만행을 일삼은 장면도 담겼다. 특히 임신부와 아기를 해부하고 있는 사진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는 그동안 야사처럼 떠돌던 ‘생체실험 전체의 과정이 일체의 마취 없이 이뤄졌다’던 일부 가해자의 증언과 폭로 수기 문서의 기록이 사실로 입증되었다는 걸 뜻한다.

731부대 이시이 시로 군의중장. 자료 사진.

공개된 사진에는 731부대를 시찰 나온 일본군 사령관의 모습과 함께 ‘731부대의 실험 대상으로 전쟁 포로들을 잡아들이라’는 공식 작전 명령서도 포함돼 있었다. 이러한 자료는 그동안 가해자들의 철저한 증거인멸 작업으로 구체적 물증이 공개된 적 없었던 731부대의 인체실험 실상을 밝혀줄 유력한 증거가 됐다. 아울러 국제 소송에서 일본의 전쟁 범죄 책임을 묻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731부대의 만행, 어떻게 알려졌나

1981년 5월 26일 치.

731부대의 만행이 처음 드러난 발단은 1981년 일본 교수가 쓴 논문이었다. 일본 국립 나가사키 장기대학의 쓰네이시 케이이치 조교수는 1981년 5월 란 제목의 연구서를 통해 731부대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밝혀냈다. 쓰네이시 교수는 “세균전 전문부대인 731부대가 유행성출혈열을 세균전에 이용하기 위해 많은 한국인과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인체실험까지 한 뒤 이들을 모두 독살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731부대의 인체실험 방법까지 상세히 기술했다. 보고서가 밝힌 실험 방법은 아래와 같다.

“건강한 인간에 병원체를 보유한 진드기를 빻아 넣어 만든 식염수유제를 주사해 , 유행성출혈열에 감염시킨다. 발병으로부터 5일 이내에 산사람으로부터 내장을 적출, (중략) 병원체가 남아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결국은 산 채로 해부한다. (중략) 패전 직전에는 증거인멸을 위해 이 실험에 이용한 포로들에게 밥에 청산가리를 타 죽이거나 권총으로 모두 사살했다.”

731부대에서 이뤄진 생체실험. 자료 사진.

731부대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밝힌 쓰네이시 교수의 보고서는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그동안 일본 내에서 731부대는 ‘일본(관동)군 방역급수부’란 이름으로 창설돼 표면적으로는 전염병 예방이나 전쟁 중 음료수의 공급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연구 보고서는 추후 731부대의 연구 결과가 미군의 세균전 연구에도 사용되었고, 여기에 731부대 생존 간부들이 협력했다는 사실도 폭로했다.

쓰네이시 교수의 연구 보고서에 이어 731부대의 실상을 폭로한 추리소설도 출간됐다.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1982년 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출간한다. 모리무라는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키겠다”고 서약한 731부대 소속의 전직 요원 60여 명으로부터 정보를 얻는 데 애를 먹었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이 책은 출간한 지 4개월 만에 70만 부나 판매됐다.

731부대 야외 동사 실험 재현 모습. 자료 사진.

이런 가운데 당시 731부대원들이 전쟁 범죄에 대한 처벌을 받기는커녕 일본 사회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하나씩 밝혀졌다. 731부대의 생체 실험책임자였던 의학자는 당시의 실험 결과를 일본의 의학지에 자랑스럽게 소개했음이 밝혀져 물의를 빚기도 했다. 문제의 의학자는 라는 제목의 731부대의 연구 결과 발표에서 8살~84살의 일본인, 중국인, 몽골인 등 500명을 대상으로 동상에 대한 업종별 저항성을 조사했다고 밝혔다. 이 의학자는 “생후 3일된 신생아에 대해서도 한랭에 대한 피부혈관의 반응이 관찰됐다”고 말해 충격을 안겼다.

일본의 범죄와 미국의 은폐

일본에서 731부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무렵, 관련자들의 폭로와 생체실험을 입증할 만한 증거들이 쏟아졌다. 옛 731부대 관계자 6명이 당시의 만행을 폭로한 책도 출간됐다. 이들 가운데 여러 건의 해부를 목격했다는 부대원은 “나는 수술용 칼로 생체의 가슴을 절개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그는 “대부분의 절개 수술은 마취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실시됐다”며 “실험 대상자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그 비명은 곧 사라졌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993년 8월 15일 치.

1992년 4월에는 일본군 731부대의 인체실험 자료가 공개됐고, 1993년 8월에는 731부대 세균전 자료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1995년 7월에는 ’1940년 당시 일본군 731부대의 세균전은 육군참모본부의 지시와 당시 일왕 히로히토의 승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는 문서도 발견됐다. 1998년에는 731부대의 생체실험에 이용된 사람들의 이름과 실험 시간, 장소, 체포 경위, 심문 내용, 생체실험 결과 및 인적사항이 기록된 문서와 이를 촬영한 사진 원본이 연이어 발견됐다.

하지만 731부대원 일부의 폭로와 계속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들은 책임지지 않았다. 일본군부와 정부는 731부대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전쟁 범죄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731부대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은 국제 재판에서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군 731부대의 각종 생체실험 자료들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이들의 만행을 은폐해왔기 때문이다.

2010년 3월 20일 치.

1945년 10월, 731부대장의 오른팔이었던 대령과 곤충학자인 소령, 전 육군참모 등 3명을 미 육군의 생물전연구 기관 캠프 데트릭의 샌더스 중령이 신문한 기록에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전쟁범죄자의 적발과는 별개의 문제이니 안심하고 얘기해주기 바란다 . (중략 ) 대통령에 제출하는 비밀 보고 자료를 작성하기 때문에…”

샌더스 중령은 731부대의 신문 보고서를 1947년 12월 12일 미 국방부에 제출한다. 그가 제시한 최종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일본인 과학자들이 수백만 달러의 비용과 오랜 세월을 거쳐 얻은 자료다. 이런 정보를 우리 쪽 연구소에서는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체실험은 양심의 가책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자료를 총액 25만엔 정도로 얻었다. 연구에 투입된 비용을 따져보면 이는 미미한 금액이 될 것이다. 스스로 이런 정보를 제공한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731부대, 생체실험의 비밀. 자료 사진.

불완전한 과거 청산은 또 다른 전쟁 범죄를 양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일왕과 군국주의자들에 대한 처벌과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참고문헌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소장 일본군 전쟁범죄 관련 ‘Interagency Working Group(IWG)’문서군 중 한국 관련 자료

송소석

신동아 2005년 8월 호, 이창위

타와라 요시후미

편집국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소장 일본군 전쟁범죄 관련 ‘Interagency Working Group(IWG)’문서군 중 한국 관련 자료송소석신동아 2005년 8월 호, 이창위타와라 요시후미편집국

강민진 기자 [email protected]

日731 부대가 사람에게 자행한 실험들 – 이웃집과학자

과거 세대의 부정은 특히 그것이 은폐됐을 경우에는 현재 세대의 무거운 짐으로 그대로 남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731 부대의 경우 일본의 과학자들과 이러한 거래를 했기 때문에 일본이 안고 있던 비밀이 우리가 안고 있는 비밀이 되어버렸습니다. 조사를 해서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성실하게, 솔직하게, 정확하게 드러내고 과거를 직시해야 우리가 늘 가지고 싶던 가치관을 긍정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만이 과거와의 공범 관계로부터 젊은 세대를 해방시켜 과거의 부정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게 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젊은 세대에 은폐나 공범의 전통을 유지하도록 요구하는 대신 그들을 이 책임에서 완전히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특히 731은 페스트균 실험을 많이 했습니다. 페스트균은 ‘흑사병’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14세기 지중해 연안, 프랑스, 독일, 영국, 북유럽으로 확산해 4년 만에 유럽 인구 1/3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이를 악랄한 살육전에 적용하려 한 731은 ‘페스트 벼룩’을 개발합니다. 균 자체를 그대로 뿌리는 것이 아니라 매개 동물인 벼룩을 페스트균에 감염시켜 완충물에 섞거나 도자기 폭탄에 담아 뿌렸다고 하는군요. 실제 중국에 살포한 세균의 상당수는 이 페스트균이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파견을 나왔던 노버트 H. 펠은 1947년 6월 30일 본국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전쟁은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731 부대 사람들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731 부대가 진행한 모든 실험 데이터를 미국에 넘겨주는 대가로 부대 간부들을 제소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미국 내 연구소들은 윤리적인 이유로 인체 실험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731의 인체 실험 연구 결과들은 미국에 여러 모로 쓰임새가 많았습니다. 1947년 8월 1일 미국 정부는 전범 면책을 추진했는데요. 같은 해 12월 미국의 에드윈 V. 힐은 다음 말로 보고를 마무리했습니다.

20 thg 7, 2019 — 마루타는 일본어로 ‘통나무’를 의미합니다. 731에서는 인체 실험의 피험자를 마루타라고 불렀습니다. 마루타는 주로 헌병대에 잡힌 반만주 항일 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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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부대. 인간이길 포기한 일본의 마루타 생체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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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731 부대가 사람에게 자행한 실험들

731부대 전경. 출처: Wikimedia Commons

일본은 1932년부터 2차 세계대전 말까지 만주 일대에서 생화학 무기를 사용했습니다. 그중에서 731 부대는 제국주의 일본의 생화학 전쟁을 수행한 부대입니다. 731은 한국인과 중국인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실험을 자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731은 중국의 핑팡, 한첸, 창천 및 기타 지역에서 만주, 소련 연방, 미합중국, 영국, 호주 등 타국 출신 포로들에게도 실험을 했습니다.

731 부대 구성

731 부대는 총무부, 제1부, 제2부, 제3부, 제4부, 교육부, 자제부, 진료부로 구성됐습니다. 총무부는 ‘마루타’의 관리와 해부를 담당했습니다. 제1부는 세균 연구, 제2부는 실전 연구, 제3부는 세균배양기와 도기폭탄 제조, 제4부는 세균 제조를 담당했습니다. 진료부는 부대원의 진료와 마루타의 인체 실험을 진행합니다. 이 밖에도 4개의 지부와 1개의 실험장, 직속 항공부대를 운영했으며 총 규모는 3,000여 명이었습니다.

이시이 시로. 출처: Wikimedia Commons

731를 이야기할 때 부대장 ‘이시이 시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이시이 시로는 교토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후 육군 군의를 거쳐 1940년 8월부터 관동군 방역급수부장에 올랐습니다. 공금 횡령으로 육군 군의 소장에서 제1군 군부장으로 좌천되기도 했지만 육군 군의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731부대로 복귀했습니다.

마루타와 특이급

마루타는 일본어로 ‘통나무’를 의미합니다. 731에서는 인체 실험의 피험자를 마루타라고 불렀습니다. 마루타는 주로 헌병대에 잡힌 반만주 항일 운동가였으며 중국인 외에도 조선, 러시아인이 다수였습니다.

중국 영화 ‘마루타’의 포스터.

실험 대상자들을 연행할 때 중국 핑팡으로 연행하는 특별 수송은 ‘특이급’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실험 대상자들을 조달하기 위해 군이 특별히 정한 이름이었다고 하는데요. 731 일원 중 한 명이었던 가와시마 기요시 세균제조부장은 1949년에 진행된 하바롭스크 재판에서 특설 감옥에는 여성이나 어린이들도 수용됐다고 인정했습니다. 특이급으로는 적어도 8,000여 명이 이송돼 실험 대상이 됐으며 한 명도 살아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시이 시로를 위시한 731 부대는 천황의 칙령으로 창설된 유일한 부대라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왜곡된 자부심은 생화학 무기를 만들기 위한 끔찍한 인체실험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무 죄 의식 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실험 대상자에게 31종류의 실험을 자행합니다.

1. 세균 감염 실험

실험을 하고 있는 731부대의 의사. 출처: 유튜브/The Front

731은 실험 대상자들에게 각종 세균을 주사하거나 만두에 섞어 먹이고 그 독성을 실험했습니다. 실험 대상자를 일부러 이질에 감염시키기도 했으며 파상풍균을 주입해 관찰했습니다. 세균 마스크를 씌운 사람과 안 씌운 사람들을 별도의 말뚝에 세운 다음 청산가스를 뿌려대며 유심히 그 변화를 살펴봤습니다.

특히 731은 페스트균 실험을 많이 했습니다. 페스트균은 ‘흑사병’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14세기 지중해 연안, 프랑스, 독일, 영국, 북유럽으로 확산해 4년 만에 유럽 인구 1/3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이를 악랄한 살육전에 적용하려 한 731은 ‘페스트 벼룩’을 개발합니다. 균 자체를 그대로 뿌리는 것이 아니라 매개 동물인 벼룩을 페스트균에 감염시켜 완충물에 섞거나 도자기 폭탄에 담아 뿌렸다고 하는군요. 실제 중국에 살포한 세균의 상당수는 이 페스트균이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파견을 나왔던 노버트 H. 펠은 1947년 6월 30일 본국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벼룩 번식법과 쥐를 통해 벼룩을 감염시키는 방법을 방대하게 연구했다. 페스트 벼룩은 최선의 조건 하에서는 약 30일 생존하는데 그동안 감염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판명됐다. 1㎡당 벼룩 20마리가 있는 방에서 실험 대상자를 자유롭게 풀어두는 실험을 했는데 10명 중 6명이 감염되고 4명이 사망했다.

탄저균 실험도 자행했다고 합니다. 노버트 H. 펠은 탄저균 폭탄 실험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사람을 묶어 헬멧을 씌우고 갑옷을 입혔다. 지상에서 고정해 폭발하는 것, 비행기에서 투하된 시한 기폭 장치가 설치된 것 등 각종 폭탄으로 실험했다.

다른 폭탄을 사용한 야외 실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10명 중 6명의 혈액에서 균이 발견됐고 이 중 4명은 호흡기로부터 감염됐다고 추정했다. 4명 모두 사망했다. 이 4명과 일제히 폭발한 9개 폭탄과의 거리는 불과 26m였다

731 부대는 세균 폭탄을 투하하거나 세균을 살포하기도 했습니다. 1940년 10월 4일에 중국 취현에 투하한 페스트탄은 1,5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으며 1940년 11월 4일 중국 창더에는 페스트 벼룩을 살포했는데요. 주변 마을까지 페스트가 확산해 7,0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일본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941년 713은 중국 창태에서 콜레라균을 이용해 공격을 했는데요. 이 바람에 일본군 병사 1,700여 명까지 목숨을 잃었습니다.

2. 극한 환경 노출

731 부대의 동상 실험. 출처: Wikimedia Commons

731 부대는 진공, 기아, 화학가스, 화력, 냉동 등 극한 상황에 따른 인체의 반응과 생존력을 알아보는 실험을 했습니다. 영하 50도의 방에 실험 대상자들을 넣어 죽을 때까지 방치하며 관찰하는 식입니다. 1938년부터 1945년 패전까지 731 부대에 복무한 요시무라 히사토는 동상을 연구하기 위해 피험자들의 손발을 일부러 얼려 피부 온도와 손가락의 용적 변화를 관찰했습니다.

전쟁 이후 요시무라는 이 연구 결과를 영어 논문으로 다시 발표했는데요. 실험 대상 중에는 생후 3일 된 신생아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요시무라는 영어 논문에 피험자들의 손발을 얼렸음을 시사하는 지표는 싣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상 실험으로 생긴 동상. 출처: 유튜브/JTBC Culture

또한 군의관 다니무라 가즈히루는 1941년 2월 6일 이른 아침 실험 대상자들에게 젖은 양말이나 장갑을 착용시킨 후 술을 먹이거나 아트로핀을 투여하는 등의 여러 조건을 설정해 동상 실험을 실시했습니다.

물만 마시며 버티는 실험도 했습니다. 1935~1936년까지 도고 부대에서 복무한 구리하라 요시오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본인은 군속 스가와라 사토시 씨 밑에서 물만 마시면 며칠 동안 사는가를 실험했다. 그 결과 보통 물로는 45일, 증류수로는 33일을 살았다. 증류수만 먹은 사람은 죽음이 가까워지자 ‘맛있는 물을 달라’고 호소했다”

3. 의학 실습

잔혹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731 부대 의사들. 출처: Wikimedia Commons

1945년 5~6월 규슈제국대학 의학부 제1외과 이시야마 후쿠지로와 제자들은 격추된 미군 B29 탑성원 포로 8명을 대상으로 수술 실험을 했습니다. 수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5월 17일 포로 2명의 한쪽 폐를 전부 적출

5월 22일 포로 2명 중 1명에게 위 전 적출 수술. 대동맥을 압박해 지혈하고 심장 정지시킨 후 개흉 심장 마사지, 심장 수술, 나머지 1명은 상복부 절개하고 담낭을 적출, 간장의 편엽을 절제

5월 25일 포로 1명에게 뇌수술(3차 신경 차단)

6월 2일 포로 3명 가운데 1명에게 오른쪽 대뢰동맥에서 약 500cc를 채혈한 후 대용 혈액약 300cc 주사. 1명에게 폐동격 수술, 나머지 1명에게 담낭 적출, 대용 혈액 200cc 주사, 간장 절제, 개흉 심장 마사지, 심근 절개 및 봉합, 대동맥 압박 지혈

동상 실험을 했던 다니무라라는 인물은 실험 대상자들에게 야외 실습 실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니무라는 동계 위생 연구반을 조직해 텐트에서의 수술, 지혈, 수혈 등에 대해 가르치는 야외 실습을 했는데요. 중국인 8명을 생체 실험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이 8명은 실험이나 수술이 끝난 뒤 살해돼 생체 해부용으로 쓰이거나 총살됐다고 합니다.

731부대의 실험에 희생되고 있는 피험자. 출처: Wikimedia Commons

이 외에도 피험자들의 혈액을 이용한 실험도 있었다고 합니다. 고속원심분리기로 사람을 마구 돌려 사람의 생피를 짜내는 착혈 실험과 인간과 말의 피를 서로 교환해보는 인마혈 실험도 진행했습니다.

아무도 처벌 받지 않아

2차 대전이 끝나고 전쟁은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731 부대 사람들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731 부대가 진행한 모든 실험 데이터를 미국에 넘겨주는 대가로 부대 간부들을 제소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미국 내 연구소들은 윤리적인 이유로 인체 실험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731의 인체 실험 연구 결과들은 미국에 여러 모로 쓰임새가 많았습니다. 1947년 8월 1일 미국 정부는 전범 면책을 추진했는데요. 같은 해 12월 미국의 에드윈 V. 힐은 다음 말로 보고를 마무리했습니다.

일본 과학자가 수백만 달러와 긴 세월을 들여 얻은 데이터다. 특정 세균의 인간에 대한 감염 및 발병에 관한 이런 정보는 우리 연구소에서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에 대한 실험을 우리가 할 수 있는지 의문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데이터는 오늘까지 총액 25만엔으로 수행됐으며 연구에 걸리는 실제 비용에 비하면 미미한 금액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생체 실험 주범들에게 월급을 주고 실험 인원으로 고용하기도 했으며 미국의 화학전 요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까지 요청했습니다.

731 부대의 과학자들은 전쟁에서 패망하자 인체 실험을 한 사실을 은폐하려고 했습니다. 이시이 시로는 일본이 미군에 항복하자 부대에 남아있던 포로들을 학살하고 실험용 쥐를 풀어 증거를 인멸했다고 합니다. 이시이 시로 또한 부대원들에게 비밀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린 뒤 미국에게 실험 데이터를 넘기는 조건으로 면책을 받았습니다.

또한 일본 의학계는 731 부대 관계자들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고 합니다. 731 부대가 작성한 여러 논문이 있는데요. 이 가운데는 731 부대 시절에 작성한 육군 군의학교 방역 연구 보고 게재 논문을 학위 논문으로 그대로 제출해 통과한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731 부대가 작성한 논문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직 내에 있는 페스트균 염색법에 관한 연구(게이오, 1946)

파상풍과 키소이드의 예방적 효력에 대해(구마모토, 1946)

이질균 분류에 대해(구마모토, 1946)

장기 손상의 후유 기능 장해에 대해(도쿄, 1947)

뇌척수액 당량의 변화에 대한 연구(니가타, 1949)

또한 2018년 3월에는 1945년에 발표된 <개벼룩을 통한 페스트 매개 가능성>이라는 교토대학교 논문이 731 부대가 자행한 인체 실험일 가능성이 있다는 문제제기가 나왔습니다. 논문에는 원숭이에게 개벼룩을 옮기자 원숭이가 두통을 느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가츠오 의대 니시야마 명예교수는 두통의 자세하고 사실적인 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원숭이가 아니라 인간에게 행해진 실험일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피험자들을 이용해 동상 실험을 했던 요시무라 히사토는 독일에서 “의사들은 인체 실험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지도 모른다”는 변명을 내놨습니다. 요시무라 역시 교토 부립 의과대학에서 교수에서 학장으로 승진했으며 1978년에는 ‘환경적응학’에서 선구적인 실적을 올렸다는 이유로 훈삼등욱일상을 받았습니다.

나치와 731 부대는 사람을 대상으로 극악한 전쟁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독일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에 소속됐던 23명의 피고 중 15명이 ‘인류에 대한 범죄’로 유죄 판정을 받았고 7명에 교수형 선고가 내려졌는데요. 반면 일본 731 부대는 아직도 일본 정계와 보건, 의료계에서 버젓이 힘을 과시하며 세를 유지 중입니다.

2007년 4월에 개최된 제27회 일본의학회 총회 프로그램 중 ‘전쟁과 의학’ 전시 실행 위원회 주최 심포니엄에서 미국 하버드대학교 위크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과거 세대의 부정은 특히 그것이 은폐됐을 경우에는 현재 세대의 무거운 짐으로 그대로 남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731 부대의 경우 일본의 과학자들과 이러한 거래를 했기 때문에 일본이 안고 있던 비밀이 우리가 안고 있는 비밀이 되어버렸습니다. 조사를 해서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성실하게, 솔직하게, 정확하게 드러내고 과거를 직시해야 우리가 늘 가지고 싶던 가치관을 긍정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만이 과거와의 공범 관계로부터 젊은 세대를 해방시켜 과거의 부정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게 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젊은 세대에 은폐나 공범의 전통을 유지하도록 요구하는 대신 그들을 이 책임에서 완전히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참고자료##

전쟁과의료윤리검증추진회 및 스즈키 아키라 <731 부대와 의사들>

강준만 <미국사 산책 7 - 뜨거운 전쟁과 차가운 전쟁>

신규환 <질병의 사회사>

최석민 <초대하지 않은 손님, 전염병의 진화>

권복규 <생명 윤리와 법>

김지희, and 이시영. “생물작용제를 포함한 대량살상용 생물학적 무기에 대한 역사 및 법률적 안전규제 사항에 관한 고찰.” 한국안전학회지 (구 산업안전학회지) 22.4 (2007): 10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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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731부대’의 ‘마루타’ 생체 실험 – 네이버 블로그

일제의 만행에 대한 사건을 되짚어 올라가 보면 ‘마루타’라는 생체실험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에 엄청난 구타와 고문, 성 고문 그리고 생체실험까지 당하며 잔인하고 끔찍하게 죽어가야만 했다는 사실…

일제강점기 여러 개의 연구반으로 구성된 ‘731부대’가 만주지역에서 3,000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생체실험을 한 것입니다. 실험의 상대는 러시아인, 영국인, 중국인, 몽골인, 한국인 등으로 국적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2차대전 당시 일제 세균부대 중 하나였던 ‘731부대’에서 희생된 인체실험 대상자를 일컫는 말로 ‘마루타’는 일본 말로 ‘통나무’라는 뜻입니다.

14 thg 8, 2017 — 2차대전 당시 일제 세균부대 중 하나였던 ‘731부대’에서 희생된 인체실험 대상자를 일컫는 말로 ‘마루타’는 일본 말로 ‘통나무’라는 뜻입니다. ​. 일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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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극비 인체실험 731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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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731부대’의 ‘마루타’ 생체 실험

일제의 만행에 대한 사건을 되짚어 올라가 보면 ‘마루타’라는 생체실험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에 엄청난 구타와 고문, 성 고문 그리고 생체실험까지 당하며 잔인하고 끔찍하게 죽어가야만 했다는 사실…

2차대전 당시 일제 세균부대 중 하나였던 ‘731부대’에서 희생된 인체실험 대상자를 일컫는 말로 ‘마루타’는 일본 말로 ‘통나무’라는 뜻입니다.

일제강점기 여러 개의 연구반으로 구성된 ‘731부대’가 만주지역에서 3,000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생체실험을 한 것입니다. 실험의 상대는 러시아인, 영국인, 중국인, 몽골인, 한국인 등으로 국적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마루타 인체 실험

Mitchell, J. (2013, June 3). Code Name: Maruta – The Horrors of Unit 731. In What Culture. Retrieved from http://whatculture.com/history/code-name-maruta-the-horrors-of-unit-731.php

McNaught, A. (2002, February 3). Unit 731: Japan’s biological force. BBC News World Edition. Retrieved from http://news.bbc.co.uk/2/hi/programmes/correspondent/1796044.stm

5 thg 10, 2021 — 마루타 인체 실험 …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의사들은 독극물 주사와 생식기 제거 같은 인체 실험을 유대인들에게 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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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731부대 인체실험 마루타 (실제 발생한 뼈아픈 역사) ㅣ토요미스테리ㅣ디바제시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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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타 인체 실험 – May We Speak?

McNaught, A. (2002, February 3). Unit 731: Japan’s biological force. BBC News World Edition. Retrieved from http://news.bbc.co.uk/2/hi/programmes/correspondent/1796044.stm

Mitchell, J. (2013, June 3). Code Name: Maruta – The Horrors of Unit 731. In What Culture. Retrieved from http://whatculture.com/history/code-name-maruta-the-horrors-of-unit-731.php

731부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그래서 육군이 여러 차례 회의한 결과 결정하여 기온의 변화, 환경이 다르므로··· 하나는 만주의 북단으로 가면 좋겠다는 것이어서 결국 연구소를 그곳에 두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계속 발전하여 우선 전쟁터가 4천 킬로미터나 넓어져··· 1년 내내 동시에 계속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우선 장병의 신체를 보호하고 사망률을 낮추려는 국가 백년의 계획을 세울 것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육군군의학교에 연구실을 만들었고 다음으로 만주는 하얼빈에··· 또 남지는 중산대학을 중심으로 그 외 수차 연구실을 만들어 실시하였고 결국 324개의 연구소를 만든 겁니다. 그 결과 전염병 및 전염병 사망률이 낮아져 대장성이 매우 기뻐하여 그렇다면 계속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하얼빈에 큰, 그러니까 마루 빌딩의 14배 정도의 연구소를 만들어 주었고 그 안에 전차도 있고 비행기도 있었습니다. 모든 종합대학에 연구소가 만들어지고 거기서 열심히 연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선생님께서 가장 주력하신 것인 인적요소입니다. 각 대학에서 가장 우수한 교수 후보를 모아 주셔서 여기 계신 이시가와 교수, 그리고 도호쿠대학의 오카모토 교수 그 외 십여 명의 교수진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대동아의 전면에 걸쳐 이 민족선 방어의 제1차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련이 왔기 때문에, 패전 때문에 부대는 폭발하고 모두 태우지 않을 수 없었고 비운으로 끝난 것입니다.”

제1부(부장:菊池斉 / 세균 연구) 제1과(티푸스) 田部班(반장:田部井和 / 티푸스 연구) 제2과(콜레라) 湊班(班長:湊正男 / 콜레라 연구) 제3과(생리・마루타 관리) 吉田班(건강진단) 宮川班(엑스레이) 在田班(엑스레이) 栗秋班(약리) 草味班(반장:草味正夫 / 약리 연구) 石井班(포로 입출 관리) [19] 蓬田班(포로 입출 관리) 志村班 특별반(특설 감옥) 제4과(이질) 江島班(반장:江島真平 / 이질 연구) 제5과(페스트) 高橋班(반장:高橋正彦 / 페스트 연구) 제6과(병리) 石川班(반장:石川太刀雄丸 / 병리 연구) 岡本班(반장:岡本耕造 / 병리 연구) 제7과 제8과(리케치아) 野口班(반장:野口圭一 / 리케치아・벼룩 연구) 제9과(수서곤충) 田中班(반장:田中英雄 / 곤충 연구) 제10과(혈청) 内海班(혈청 연구) 小滝班(튜버큘린) 제11과(결핵) 肥之藤班(脾脱疽) 太田班(반장:太田澄 / 탄저 연구) 樋渡班 降旗班(페스트) 金沢班 貴宝院班(천연두) 二木班(반장:二木秀雄 / 결핵 연구) 소속과 안밝혀짐 笠原班(반장:笠原四郎 / 바이러스 연구) 吉村班(반장:吉村寿人 / 동상 연구)

이를 통해 정리해보면 대학 이상의 규모와 기동력을 가진 연구기관을 창설하여 운영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고 324개의 연구소를 갖추고 일본을 대표하는 의학자, 과학자들이 참가한 세계 최대의 생체실험센터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패전으로 야망이 좌절되고 생체실험 등에 대한 것이 알려져 비판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의 언급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패전으로 연구나 실험이 중단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만 드러나 있다. 731부대에는 일본의 최고학부를 졸업한 엘리트 의사나 과학자가 다수 있었고, 이들은 전쟁 후에 전범 기소를 받지 않은 채 각 대학으로 돌아가 일본 의학계의 중진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70년대 약해(薬害) 에이즈 사건[27]으로 피고가 된 녹십자 제약회사의 창시자는 시로의 최측근이었던 나이토 료이치이며, 그는 731부대장을 역임한 바 있는 기타노 세이지를 고문으로 두고 있어서, 731부대와 그 연속성을 찾아볼 수 있다.

중일 전쟁(1937~1945년)을 거쳐 1945년까지 생물·화학 무기의 개발 및 치명적인 생체 실험을 행하였다. 공식적으로는 ‘헌병대 정치부 및 전염병 예방 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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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34회 요약] 일제의 끔찍한 생체실험.. 시인 ‘윤동주’도 피해자였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SBS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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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마루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731부대의 실험 재료에 대해서는 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731부대의 실험 재료에 대해서는 731부대#활동 문서를, 다른 뜻에 대해서는 마루타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하얼빈의 731 기념관.

731부대(일본어: 731部隊 나나산이치부타이[*] )는 일본 제국 육군 소속 관동군 예하 비밀 생물전 연구개발 기관으로,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에 있던 부대이다. 공식 명칭은 관동군 검역급수부(일본어: 関東軍防疫給水部 かんとうぐんぼうえききゅうすいぶ[*] )이다.

1936년에 설립되어 초기에는 ‘관동군 방역급수부’, ‘동향부대’로 불리다가 향후에는 ‘731부대’로 개명하였다. 중일 전쟁(1937~1945년)을 거쳐 1945년까지 생물·화학 무기의 개발 및 치명적인 생체 실험을 행하였다. 공식적으로는 ‘헌병대 정치부 및 전염병 예방 연구소’, ‘방역과 급수에 대한 임무’로 알려졌으며 실제로 731부대의 총 책임자인 ‘이시이 시로’는 731부대의 진짜 목적을 위장하기 위해 휴대용 야전 정수기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원래는 태평양 전쟁 전 정치 및 이념 부서로 설립되어 적에 대한 사상, 정치적 선전과 일본군의 사상 무장이 임무였다. 첫 부임자였던 의사 이시이 시로(石井四郞)의 이름을 따라, 이시이 부대(石井部隊)라고도 불린다. 731부대는 또한 히로히토의 칙령으로 설립한 유일한 부대이며, 히로히토의 막내 동생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부대의 장교(고등관)로 복무하였다.

직접 관련되어 있지는 않으나, 아베 신조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도 1936년 10월부터는 만주국에 부역하였는데 1936년 산업부 차장에서 1939년 총무청 차장으로 승진하여 만주국의 산업정책을 실질적으로 담당하게 된다.

설명 [ 편집 ]

이 부대는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 핑팡(平房, 당시 만주국 괴뢰 정부의 영토)에 주둔해 관동군 관할 구역 내의 정수 업무를 하는 것으로 위장되었다. 이 부대는 일본의 정치적 선전, 일본 군대의 사상적 대표로서 업무를 수행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 정치 선동에 대항해 일했으나 나중에 그 영역이 확대되었고, 화학·세균전 준비를 위한 연구와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생체 실험을 위한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관동군 주력부대에 물을 공급하는 급수전문 전투지원부대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생체실험을 자행한 부대였다.[1]

731부대는 크게 보면, 독일 나치의 SS같은 정치 선동 부서이다. 여기서는 일본인의 인종적 우월성, 인종주의 이론, 방첩 활동, 정보 활동, 정치적 사보타주, 적 전선 침투 등에 관한 활동을 하였다. 이 부대는 만주 헌병대, 만주 정보기관, 만주 정규 경찰, 만주 거류민 위원회, 지역 만주 민족주의 정당, 일본 비밀 정보기관과 긴밀히 연락했다. 이 부대의 만주에 있는 부문에서는 러시아인, 중국인, 만주인, 몽골인과 기타 특수 부서, 비밀 부서 경력의 외국인을 활용했다.

민간인과 군인 모두 1만 명의 중국인과 조선인, 몽골인, 러시아인이 이 부대의 실험 대상이었다. 일부 미국인과 유럽인 등 연합군 전쟁 포로가 731부대에 잡혀갔다. 게다가 이 부대에서 생물학 무기 프로그램에 의해 연구된 생물학 무기의 사용으로 수만 명의 중국인이 죽었다.

731부대는 일본제국이 세운 생물전 연구기관 중 하나였으며, 516부대(치치하얼 시, 齊齊哈爾), 543부대(하이라얼 시, 海拉尔), 773부대(Songo), 100부대(창춘, 長春), 1644 부대(난징, 南京), 1855부대(베이징, 北京), 8604부대(광저우, 廣州), 200부대(만주), 9420부대(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각지에 세워진 기관도 731부대와 유사하거나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헌병대가 관리하였다.

인체를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는 부대의 속성상, 부대 주변 지역을 전부 소개하고 지역주민을 전부 추방시킨 사례나, 부대 인근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생물학 무기를 실험한 사례등 인근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사례까지 알려져 있는 등 하얼빈역에서 출발한 열차가 부대 인근 지역을 통과 시 열차 커튼을 모두 내려야 하고 부대 인근 지역을 차창밖으로 내다보는 승객은 그 자리에서 체포/심문하는 규정이 존재하였을 정도로 보안에 매우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731부대와 관련된 많은 과학자가 나중에 정치, 학계, 사업, 의학 부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일부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 또 다른 일부는 중국공산당에 체포되어 푸순전범관리소에서 심문을 받았다. 미국에 항복한 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를 제공하는 대가로 사면받았다. 그들이 행한 잔인한 행위 때문에 731부대의 활동은 유엔에 의해 전쟁범죄로 선포되었다.

형성 [ 편집 ]

1932년 이시이 시로는 ‘육군 전염병 예방 연구소’라는 이름의 의무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와 그 부하들은 종마 수용소를 건설했다. 이곳은 그 지역에는 종마 요새로 알려져 있다. 이 실험 수용소는 ‘베이인허’에 있는데, 하얼빈 시에서 남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이시이 시로는 ‘토고 부대’를 조직했는데 화학, 생물학 작전을 하기 위한 비밀 연구 그룹이다. 1935년 탈옥과 폭발이 있었고, 이시이는 종마 요새를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중에 핑팡(하얼빈 시에서 남쪽으로 24킬로미터)으로 가서 훨씬 더 큰 새로운 시설을 만들었다.

이 부대는 나중에 관동군으로 통합되어 ‘전염병 예방부’가 되었고, 같은 시기에 ‘이시이 부대’와 ‘와카마쓰 부대’로 나위어졌다. 창춘에 있었다. 1941년부터 이 부대들은 합쳐서 ‘관동군 방역 급수부’ 또는 731부대로 불린다. 이 부대는 제국청년군(Imperial Young Corps), 대학의 연구소, 헌병대의 지원을 받았다. 어떤 이는 731부대가 헤로인 생산을 위해 만주에서 양귀비를 경작하던 미쓰이 재벌과 연계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당시 일본의 헌병대는 2개로 분류돼 있었다. 내부담당 헌병과 외부담당 헌병이 있었는데 국내에 있는 헌병은 육군대신(국방부장관) 아래 있었다. 외부의 헌병은 침략국에 가면 군령 헌병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군사령관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힘이 있었다. 군인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민간인도 관할했다.… 1938년 8월 26일전에는 특별취급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 후에 있었는데, 특히 구 만주국을 침략했던 헌병들은 특별 이송취급도 관할했다. 관동부 헌병 사령부가 마루타를 취급하고 있는 헌병대로 통지서를 보내 소련에 대한 정보활동을 한 사람, 반만항일(反滿抗日)에 관련된 자, 군과 국가에 대한 반항죄에 해당하는 자는 체포하여 특별취급으로 규정해서 731부대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 당시 일본 제86부대의 헌병이었던 일본인 미오 유타카(1998년 7월 사망)[2]

활동 [ 편집 ]

암호명 ‘마루타’의 특별계획은 실험할 때 인간을 사용하였다. 실험 대상은 주위 인구 집단에서 징용되었고 이들은 완곡어법으로 ‘통나무’(마루타)라 불리었다. 마루타란 용어는 구성원 중 일부의 농담에서 유래했다. 이 시설을 지역 당국에는 제재소라고 했기에 그런 농담이 생겼다. 실험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였고, 심지어 임산부까지 동원되었다. 수많은 실험과 해부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마취없이 이뤄졌고, 이는 부패 등이 실험결과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3]

생체 해부와 의학 실습 [ 편집 ]

수천 명의 수용소의 사람들은 생체 해부의 대상이 되었으며, 많은 해부가 실험의 유효성을 위해 마취없이 이루어졌고 피해부자들은 대부분 사망하였다.[4] 수용자들을 다양한 질병에 감염시킨 후 외과수술로 해부하였고, 질병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장기를 제거하였다. 감염이나 해부를 당한 대상은 성인 남녀뿐 아니라 아동이나 영아 또한 포함하였다.[5]

출혈의 연구를 위해 수용자의 팔다리를 절단하였고, 절단된 팔이나 다리를 수용자의 반대편에 다시 봉합하는 실험 또한 진행되었다. 몇몇 수용자의 팔이나 다리는 얼려져 절단되었는데 일부는 다시 녹여져 치료받지 않은 괴저 및 부패의 영향을 연구에 사용되었다. 일부 수용자의 위는 외과적으로 절제되었고 식도와 장이 연결되기도 했다. 이외에 뇌, 폐, 간 등의 절제 수술 또한 행해졌다.[4]

일본 제국의 외과의사였던 유아사 켄(湯浅謙)은 생체실험은 731부대의 밖에서도 널리 행해졌으며[6] 중국 대륙에서의 실험에 약 1000명의 일본군이 관여되어 있을 것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7]

1945년 5~6월 규슈제국대학 의학부 제1외과 이시야마 후쿠지로와 제자들은 격추된 미군 B-29 탑승원 포로 8명을 대상으로 수술 실험을 하였다. 수술 내용은 다음과 같다.[8]

5월 17일 포로 2명의 한쪽 폐를 전부 적출

5월 22일 포로 2명 중 1명에게 위 전 적출 수술. 대동맥을 압박해 지혈하고 심장 정지시킨 후 개흉 심장 마사지, 심장 수술, 나머지 1명은 상복부 절개하고 담낭을 적출, 간장의 편엽을 절제5월 25일 포로 1명에게 뇌수술(3차 신경 차단)

6월 2일 포로 3명 가운데 1명에게 오른쪽 대뢰동맥에서 약 500cc를 채혈한 후 대용 혈액약 300cc 주사. 1명에게 폐동격 수술, 나머지 1명에게 담낭 적출, 대용 혈액 200cc 주사, 간장 절제, 개흉 심장 마사지, 심근 절개 및 봉합, 대동맥 압박 지혈

동상 실험을 했던 다니무라라는 인물은 실험 대상자들에게 야외 실습 실험을 하기도 하였다. 다니무라는 동계 위생 연구반을 조직해 텐트에서의 수술, 지혈, 수혈 등에 대해 가르치는 야외 실습을 했는데, 중국인 8명은 생체 실험 재료로 사용되었다. 이 8명은 실험이나 수술이 끝난 뒤 살해돼 생체 해부용으로 쓰이거나 총살됐다고 한다.

생화학 실험 [ 편집 ]

수용자에게는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이 예방접종으로 위장된 채 접종되었다.[9] 치료받지 않은 성병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남녀 수용자에게 일부러 매독, 임질을 감염시키고 연구하였다. 수용자들은 간수 등에게 강간당하기도 했다.[10]

전염성 벼룩, 감염된 의류와 물자가 폭탄 안에 포장되어 다양한 목표물에 투하되었다. 이때 이시이 시로 중장이 직접 개발한 도자기 폭탄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도자기 폭탄은 폭발력을 고의로 약하게 만들어 안에 내장된 세균이 죽는 것을 최소화했다. 이에 따라 흑사병, 콜레라, 탄저 등 전염병으로 약 40만 명의 중국인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11][12] 중국 민간인에게 야토병 관련 실험이 행해지기도 했다.[13] 731부대와 소속 군부대(주로 1644부대나 100부대)는 생화학무기를 개발하여 전투에서 실험하기도 하였다.

특히 페스트균 실험을 많이 했다. 페스트균은 흑사병으로도 잘 알려져있는데, 14세기 지중해 연안, 프랑스, 독일, 영국, 북유럽으로 확산해 4년 만에 유럽 인구 1/3 이상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였다. 이를 살육전에 적용하려 한 731은 ‘페스트 벼룩’을 개발한다. 균 자체를 그대로 뿌리는 것이 아니라 매개 동물인 벼룩을 페스트균에 감염시켜 완충물에 섞거나 도자기 폭탄에 담아 뿌렸다고 한다. 실제 중국에 살포한 세균의 상당수는 이 페스트균이었다. 미국에서 파견을 나왔던 노버트 H. 펠은 1947년 6월 30일 본국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14]

벼룩 번식법과 쥐를 통해 벼룩을 감염시키는 방법을 방대하게 연구했다. 페스트 벼룩은 최선의 조건 하에서는 약 30일 생존하는데, 그동안 감염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판명됐다. 1㎡당 벼룩 20마리가 있는 방에서 실험 대상자를 자유롭게 풀어두는 실험을 했는데, 10명 중 6명이 감염되고 4명이 사망했다. — 페스트 벼룩 실험에 대해

사람을 묶어 헬멧을 씌우고 갑옷을 입혔다. 지상에서 고정해 폭발하는 것, 비행기에서 투하된 시한 기폭 장치가 설치된 것 등 각종 폭탄으로 실험했다. — 탄저균 폭탄 실험에 대해

10명 중 6명의 혈액에서 균이 발견됐고 이 중 4명은 호흡기로부터 감염됐다고 추정했다. 4명 모두 사망했다. 이 4명과 일제히 폭발한 9개 폭탄과의 거리는 불과 26m였다. — 다른 폭탄을 사용한 야외 실험에 대해

연구소에서 키운 벼룩을 저공비행으로 중국 도시에 살포했는데, 1940년에는 닝보시에서, 1941년에는 창더 시와 허난성에서 살포가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발생한 페스트 전염으로 수천 명이 살해당했다.[15]

기타 여러 실험 [ 편집 ]

일부 수용자는 질식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알아보기 위하여 목을 매달았다.

일부 수용자는 색전이 생기는 시간을 결정하기 위하여 동맥(또는 심장)에 공기가 주입되었다.

일부 수용자는 신장에 말의 소변이 주입되었다.

일부 수용자는 사망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결정하기 위하여 물과 음식을 전혀 주지 않았다.

일부 수용자는 사망할 때까지 저기압의 방에 놓였다.

일부 수용자는 극저온에 놓이어 동상이 걸리게 하였다. 그런 조건에서 얼마나 생존하는지, 인체 살의 부패와 괴저가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이는 주로 여성 수용자에게 행해졌다.

일부 실험은 온도와 화상, 인간 생존의 관계를 알기 위한 것이었다.

일부 수용자는 원심분리기에 넣어져 사망할 때까지 돌려졌다. 인체 수분 함량 비율을 알기 위해서였다.

동물의 혈액이 일부 수용자에게 주입되어 그 효과가 연구되었다.

일부 수용자를 가스실에 넣어 다양한 종류의 화학 무기를 시험했다.

바닷물이 몇몇 수용자에게 주사되었다. 바닷물이 생리식염수를 대체할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무기시험 [ 편집 ]

731부대는 인간 목표물을 다양한 거리에 위치시켜 수류탄의 살상력을 시험하였다. 인간들은 화염방사기의 실험에도 사용되었으며, 생화학무기나 기타 폭탄들도 시험되었다.[16][17]

실험 외의 살인 [ 편집 ]

731부대의 판임관(위관급 장교)과 고등관(영관급 장교 및 기사(의사)들은 실험이 이미 끝났지만 살아있는, 그러나 실험으로 인해 쇠약해지거나 병들어 죽음을 앞둔 수용자들을 원판에 묶은 뒤 원판을 돌리며 그 원판에 단검을 던지는 게임을 했다. 이때 판임관들 사이에서 도박이 행해졌는데 명중되는 부위를 걸고 자신이 선택한 수용자의 신체부위에 단검이 명중되었을 경우 그 간부가 도박에 걸어놓은 돈을 전부 획득했다.

731부대의 군인들은 때때로 아직 실험하지 않은 여성 수용자들을 강간치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731부대에서는 병사들의 군기를 확립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수용자 중에 가장 병약하거나 가장 저항이 심한 수용자를 실험재료로 사용하기 전에 육모 방망이로 때려서 숨지게 하도록 강요했다. 이는 수용자를 인간으로 인식한 일본군 병사가 수용자를 탈출시켜 주는 것과 석방을 요구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다.

구성 [ 편집 ]

이시이 부대, 즉 731부대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은 신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군(將軍) – 부대장인 이시이 시로 중장 이외에 총합 5명 이내만 존재한다.

고등관(高等官) – 좌관급 장교. 731부대에서 실험에 종사하는 기사(의사)의 경우는 소좌 내지는 중좌와 같은 대우로서 고등관으로 분류되었다.

판임관(判任官) – 위관급 장교. 실험 외적인 분야에서 책임자이거나 기사조수가 해당된다.

고원(雇員) – 부사관. 부사관 및 기타 잡다한 일의 작업반장으로서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용인(傭人) – 병사. 병사 및 가장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수용소 간수는 거의 전부 용인이다.

부서 [ 편집 ]

731부대는 6개의 부서로 나뉜다.

제1부: 여시니아증 감염, 콜레라, 장티푸스, 결핵에 대해 인간을 재료로 연구했다. 이를 위해 수용 시설 하나가 300 ~ 400명을 수용할 수 있게 건설되었다.

제2부: 생물학 무기를 연구했다. 특히 병균과 기생충을 퍼뜨리는 장치의 생산에 중점을 두었다.

제3부: 병균을 포함한 수류탄의 생산. 하얼빈 시에 위치해 있었다.

제4부: 기타

제5부: 요원 훈련

제6부 ~ 제8부: 시설, 의학, 행정 부서

상세한 편성은 오른쪽의 ‘보이기’ 클릭 총무부 부관실 조사과 방첩반 [18] 번역반 인쇄반 사진반 병요지지반(兵要地誌班) 조사반 도서반 인사과 서무과 노무반 서무실 식당 주보(酒保) 학교 기획과 경리과 관리과 건설반 공무반 동력반 운전반 전화반 군수과

제1부(부장:菊池斉 / 세균 연구) 제1과(티푸스) 田部班(반장:田部井和 / 티푸스 연구) 제2과(콜레라) 湊班(班長:湊正男 / 콜레라 연구) 제3과(생리・마루타 관리) 吉田班(건강진단) 宮川班(엑스레이) 在田班(엑스레이) 栗秋班(약리) 草味班(반장:草味正夫 / 약리 연구) 石井班(포로 입출 관리) [19] 蓬田班(포로 입출 관리) 志村班 특별반(특설 감옥) 제4과(이질) 江島班(반장:江島真平 / 이질 연구) 제5과(페스트) 高橋班(반장:高橋正彦 / 페스트 연구) 제6과(병리) 石川班(반장:石川太刀雄丸 / 병리 연구) 岡本班(반장:岡本耕造 / 병리 연구) 제7과 제8과(리케치아) 野口班(반장:野口圭一 / 리케치아・벼룩 연구) 제9과(수서곤충) 田中班(반장:田中英雄 / 곤충 연구) 제10과(혈청) 内海班(혈청 연구) 小滝班(튜버큘린) 제11과(결핵) 肥之藤班(脾脱疽) 太田班(반장:太田澄 / 탄저 연구) 樋渡班 降旗班(페스트) 金沢班 貴宝院班(천연두) 二木班(반장:二木秀雄 / 결핵 연구) 소속과 안밝혀짐 笠原班(반장:笠原四郎 / 바이러스 연구) 吉村班(반장:吉村寿人 / 동상 연구)

제2부(실시 연구, 実施研究) 八木沢班(반장:八木沢行正 / 식물균 연구) 소성반(폭탄 제조) 기상반 항공반 무선반 田中班(곤충) 篠田班(곤충) 安達 실험장

제3부(방역 급수) 서무과 제1과(검색) 제2과(毒物検知) 제3과 濾水班 급수반 운전반 공작반(濾水機) 濾水機・弾筒製造窯

제4부(부장:川島清 군의관 소장 / 세균 제조) 제1과(華頂:柄沢十三夫 군의관 소좌 / 배양 생산) 野口班(페스트・脾脱疽) 제2과 제3과(건조균・백신) 제4과(백신) 有田班(반장:有田正義 / 발진티푸스・백신) 植村班(가스괴저・脾脱疽) 소속과 안 밝혀짐 朝比奈班(반장:朝比奈正二郎 / 발진티푸스 및 백신 제조)

교육부(부장:西俊英 군의관 중좌 / 부원 교육) 서무과 교육과 위생병 취사반 진료소 錬成隊 소년대

자재부(실험용 자재) 서무과 제1과(약품 합성) 山口班(세균탄) 堀口班(유리) 제2과(구매 보급) 제3과(濾水機) 제4과(창고) 제5과(병기 보관) 제6과(동물 사육)

진료부(부속 병원) 전염병동 진료실 가족 진료소

헌병실 保機隊

지부 [ 편집 ] 무단장 지부(만주 제643부대, 지부장:尾上正男 군의관 소좌) 총무과 경리과 제1과 제2과 제3과 자재과 교육과

린커우 지부(만주 제162부대) 총무과 제1과 제2과 자재과 교육과

손오(孫呉) 지부(만주 제673부대, 지부장:西俊英 군의관 중좌) 총무과 제1과 제2과 자재과 교육과

하얼빈 지부(만주 제543부대) 총무과 제1과 제2과 자재과 교육과

다롄 지부(만주 제319부대) 총무부 연구부 제조부

부대원 [ 편집 ]

731부대 관계자 명부 이름 731부대 당시 전후 직업 이시이 시로

(石井四郎) 제 1·3대 부대장 신주쿠구 와카마츠 쵸에서 여관 경영 기타노 마사지

(北野政次) 제 2대 부대장 녹십자 공동 설립자·이사

일본 학술회의 남극 특별 의원

문무성 백일해 연구소 요시무라 히사토

(吉村寿人) 동상 연구반 교토 부립 의과대학 학장

일본 학술회 남극특별위원

생물기상학회 회장 가사하라 시로

(笠原四郎) 바이러스연구반 키타사토 연구소 다나카 히데오

(田中英雄) 페스트, 벼룩 연구반 오사카 시립대학 의학부장 미나토 마사오

(湊政雄) 콜레라 연구반 교토 대학 교수 다나베 이와

(田部井和) 티푸스 연구반 교토대학 세균학 교수

효고 현립 의과대학 교수 도코로 야스오

(所安夫) 유행성출혈열 연구반 도쿄 대학교수

테이쿄 대학 교수 에지마 신페이

(江島真平) 이질 연구반 국립 예방위생 연구소 후타키 히데오

(二木秀雄) 결핵 연구반 녹십자 공동 설립자 오카모토 코조

(岡本耕造) 병리 연구반 교토대학 의학부장

킨키대학 의학부장 이시카와 다치오마루

(石川太刀雄丸) 병리 연구반 가나자와 의학부장

가나자와 암 연구소 소장

일본 학술회의 회원 구사미 마사오

(草味政夫) 약리 연구반 쇼와 약리대학 교수 야기자와 유키마사

(八木沢行正) 식물학 연구반 국립 예방위생 연구소

일본 항생물질 학술협회 이사 아사히나 세이지로

(朝比奈正二郎) 발진티푸스·백신 제조반 국립 예방 위생 연구소 소노구치 다다오

(園口忠男) 세균전 연구반 육상 자위대 위생학교 부교장 마스다 미호

(増田美保) 세균전 연구반 방위대학교 교수 안도 코지

(安東洪次) 다롄 지부장 도쿄대학 전염병 연구소 교수

실험동물 중앙연구소 소장 가스가 다다요시

(春日忠善) 다롄 지부장 기타자토 연구소

문무성 백일해 연구회 무라타 료스케

(村田良介) 난징 1644 부대 제 7대 국립 예방위생 연구소 소장 오가와 도오루

(小川透) 난징 1644부대 나고야 시립대학 의학부 교수 나이토 료이치

(内藤良一) 육군 군의학교 방역 연구실 녹십자 공동 설립지·이시장·회장 미야가와 요네지

(宮川米次) 도쿄 제국대학 전염병연구소 소장 도시바 생물 물리 연구소 소장 오가타 도미오

(緒方富雄) 도쿄 제국대학 전염병연구소 조교수 도쿄 대학 의학부 교수 호소야 세이고

(細谷省吾) 도쿄 제국 대학 전염병연구소 교수 도쿄 대학 전염병 연구소 교수 야나기자와 켄

(柳沢謙) 결핵 연구 국립 예방 위생 연구소 소장 고지마 사부로

(小島三郎) 도쿄 제국대학 전염병 연구소 교수 국립 예방 위생 연구소 소장 고바야시 로쿠조

(小林六造) 도쿄 제국대학교수 국립 예방 위생 연구소 소장 도다 쇼조

(戸田正三) 도쿄 제국대학 교수 남극 특별 위원

카나자와 대학 교수 기무라 렌

(木村廉) 도쿄 제국대학 교수 행적 불명

관련 인물 [ 편집 ]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 기요시 기와사마의 딸로 추정

희생자들 [ 편집 ]

한국, 중국, 몽골, 러시아의 군인과 시민,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약 1만 명의 사람들이 생화학 병기의 실험 재료로서 살해되었다. 그 중에는 일부 흑인과 유럽인도 포함되었다. 731부대에서 개발된 생화학 무기로 인해 수십만 명의 중국인이 학살되었다.

한국인 희생자 [ 편집 ]

2005년 8월 2일 하얼빈 일보는 생체실험 대상자였던 1,463명의 명단을 발굴 공개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한국인 희생자는 6명으로 아래와 같다. 대부분 항일운동 또는 반파쇼 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인물로 파악되고 있다.

민간인 [ 편집 ]

‘특별이송’은 만주 지방 일대에서 일본군 헌병대가 체포한 항일 독립운동가나 국민당 국군이나 공산군 포로, 외국의 첩보원 등을 대상으로 취조를 한 뒤 완강하게 버티는 인사들은 ‘개전의 정이 엿보이지 않는다’거나 ‘항일정신이 뼈에 사무치니 없애버리는 편이 낫겠다’는 이유로 생체실험 자료인 ‘마루타’(통나무라는 뜻의 일본어)로 지정해 재판도 없이 압송하는 것이다. ‘실험 재료’가 모자란 탓에 애꿎은 민간인이 헌병대에 의해 731부대로 특별이송된 경우도 있었다.[20]

다음은 한국인을 ‘특별이송’한 자료중 일부다.

시기:1939년 6월 명령자: 하얼빈시 신시가헌병분대장 소좌 아카기 모리미 내용: 하얼빈 교외에서 중국 공산당 아청현 위원회 소속 중국과 한국인공작자 25명 이상이 회합하고 있음을 정찰해 전원 체포. 결과: 비행장에서 이시이부대가 독약을 주사해 사망.

항일전쟁 시기 사건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작가인 ‘살소(薩蘇)’의 조사에 따르면, 731부대 산하 기관에 의해 수용을 당하여 살아남은 사람은 총 4인이다. (1) 중화민국 길림성(吉林省) 중국국민당 당무 제3독도구(督導區) 108지부 서기(書記)였던 ‘이광덕(李廣德)’과 (2) 당원이었던 ‘하가훈(何家訓)’, (3) 110지부 서기였던 ‘장인천(張人天)’과, (4) 중국공산당원으로서 항련정찰원(抗聯偵察員)이었던 ‘이우지(李遇遲)’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1945년 8월 13일, 대외적으로 “삼도화학연구소(三島化學硏究所)”라고 불렸던, 흑룡강성(黑龍江省) 가목사시(佳木斯市) 만발둔(萬發屯) 동북부에 위치한 731부대 특별 분대 산하 수용소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였다. 이는 1945년 8월 12일 심야에 자행된 일본군의 수용자 학살 와중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결과였다.

탈출 이후의 행적 [ 편집 ]

이광덕은 현지 학생이었던 이장청(李長靑)에 의해 구조되어, 계철의원(啓哲醫院)에서 위급한 상황을 면하였다. 이광덕은 생존자 4인 중 유일하게 공산당 계열 인물이었던 이우지와 같은 수용실에서 탈출하는 과정 가운데, 그에게 도움을 받은 인연을 계기로, 일본이 패망한 이후 중국 공산당에 귀속하였다.

하가훈은 탈출 이후에 이름을 ‘종연’(何鍾淵)으로 바꾸고, 요녕성(遼寧省) 무순(撫順)에서 줄곧 살다가, 2018년 1월 20일 향년 9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장인천은 탈출한 뒤에 간략하게 치료를 받고, 흑룡강성의 합이빈(哈爾濱)과 제제합이(齊齊哈爾)에서 국민당 인원들을 찾은 후에, 국민당이 중국 동북 지역에 조직한 지하군(地下軍)에서 군사를 지휘하였다. 중국 삼강 지역(압록강‧송화강‧흑룡강 일대)에서 공산당 계열의 민주연군(民主聯軍)과 교전한 이후부터는 그의 행방이 불명하다.

이우지는 구조된 뒤에 소련 원동군(遠東軍) 가목사주군(佳木斯駐軍) 사령부로 넘겨진 이후로 행방이 불명하다.

이후 [ 편집 ]

일본 의학계는 731부대 관계자들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731부대가 작성한 여러 논문이 있는데, 이 가운데 731부대 시절에 작성한 육군 군의학교 방역 연구 보고 게재 논문을 학위 논문으로 그대로 제출해 통과한 사람도 있었다. 731 부대가 작성한 논문 제목은 다음과 같다.[23]

조직 내에 있는 페스트균 염색법에 관한 연구(게이오, 1946)

파상풍과 키소이드의 예방적 효력에 대해(구마모토, 1946)

이질균 분류에 대해(구마모토, 1946)

장기 손상의 후유 기능 장해에 대해(도쿄, 1947)

뇌척수액 당량의 변화에 대한 연구(니가타, 1949)

731부대의 잔인한 행위는 현재 전쟁범죄로 공표되어 있는 상태다. 하지만 절반가량인 25명이나 사면 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소련에 12명, 중국공산당에 13명(헌병대 이송책들까지 포함)이 잡혀서 하바롭스크에서 재판을 받고 푸순전범관리소에서 심문을 받고 시베리아 유형 6년 강제노동형, 만주의 푸순 유형 6년에서 10년 노동교화제에 처해졌다. 이때 공산권의 추운지역 강제노동형과 노동교화제도는 사형보다 더 끔찍한 것이었다.

일본 [ 편집 ]

소참군로 전31부대가 강탈당할 것을 우려해 즉시 모든 부대시설을 파괴하고, 실험자들을 처분한 뒤 철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공병대가 긴급히 투입되어 8월 9일부터 13일까지 4일간 본부동을 제외한 주요 건물들을 모두 폭파시켰고, 당시 생존해 있던 수백 명의 마루타들도 모두 몰살시켰다.

미국의 묵인 [ 편집 ]

극동 국제 군사 재판 때 일본의 생체실험 문제가 언급되었으나, 관련자들은 실험에서 얻은 자료들을 미국에 제공하고 러시아에 넘겨주지 않는 대가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처벌을 막은 것은 미국이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10월, 731부대장의 오른팔이었던 대령과 곤충학자인 소령, 전 육군참모 등 3명을 미 육군의 생물전연구 기관 캠프 데트릭의 샌더스 중령이 신문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온다.[24]

“전쟁범죄자의 적발과는 별개의 문제이니 안심하고 얘기해주기 바란다. (중략 ) 대통령에 제출하는 비밀 보고 자료를 작성하기 때문에…”

샌더스 중령은 731부대의 신문 보고서를 1947년 12월 12일 미 국방부에 제출한다. 그가 제시한 최종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일본인 과학자들이 수백만 달러의 비용과 오랜 세월을 거쳐 얻은 자료다. 이런 정보를 우리 쪽 연구소에서는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체실험은 양심의 가책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자료를 총액 25만엔 정도로 얻었다. 연구에 투입된 비용을 따져보면 이는 미미한 금액이 될 것이다. 스스로 이런 정보를 제공한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국은 731부대가 아닌 일본 내에서 소수의 미국인이 생체실험을 당하여 살해되었을 때 그 관련자들을 조사하고 처벌하였지만 731부대를 비롯한 자국민이외의 사람이 생체실험을 당한 경우에는 전혀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금전까지 지급하며 보호하였다.[25] 뿐만 아니라 미국은 생체 실험 주범들에게 월급을 주고 실험 인원으로 고용하기도 했으며 미국의 화학전 요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까지 요청하였다.

이시이 시로의 회고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이시이 시로 입니다.

731부대장을 역임했던 이시이 시로는 1955년 12월 교토 대학 때의 지도교수였던 기요노 겐지의 장례식장에서 이시이 기관의 설립되기까지의 경위와 규모, 목적 등에 대해 술회하였다.[26]

“그래서 육군이 여러 차례 회의한 결과 결정하여 기온의 변화, 환경이 다르므로··· 하나는 만주의 북단으로 가면 좋겠다는 것이어서 결국 연구소를 그곳에 두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계속 발전하여 우선 전쟁터가 4천 킬로미터나 넓어져··· 1년 내내 동시에 계속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우선 장병의 신체를 보호하고 사망률을 낮추려는 국가 백년의 계획을 세울 것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육군군의학교에 연구실을 만들었고 다음으로 만주는 하얼빈에··· 또 남지는 중산대학을 중심으로 그 외 수차 연구실을 만들어 실시하였고 결국 324개의 연구소를 만든 겁니다. 그 결과 전염병 및 전염병 사망률이 낮아져 대장성이 매우 기뻐하여 그렇다면 계속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하얼빈에 큰, 그러니까 마루 빌딩의 14배 정도의 연구소를 만들어 주었고 그 안에 전차도 있고 비행기도 있었습니다. 모든 종합대학에 연구소가 만들어지고 거기서 열심히 연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선생님께서 가장 주력하신 것인 인적요소입니다. 각 대학에서 가장 우수한 교수 후보를 모아 주셔서 여기 계신 이시가와 교수, 그리고 도호쿠대학의 오카모토 교수 그 외 십여 명의 교수진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대동아의 전면에 걸쳐 이 민족선 방어의 제1차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련이 왔기 때문에, 패전 때문에 부대는 폭발하고 모두 태우지 않을 수 없었고 비운으로 끝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정리해보면 대학 이상의 규모와 기동력을 가진 연구기관을 창설하여 운영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고 324개의 연구소를 갖추고 일본을 대표하는 의학자, 과학자들이 참가한 세계 최대의 생체실험센터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패전으로 야망이 좌절되고 생체실험 등에 대한 것이 알려져 비판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의 언급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패전으로 연구나 실험이 중단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만 드러나 있다. 731부대에는 일본의 최고학부를 졸업한 엘리트 의사나 과학자가 다수 있었고, 이들은 전쟁 후에 전범 기소를 받지 않은 채 각 대학으로 돌아가 일본 의학계의 중진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70년대 약해(薬害) 에이즈 사건[27]으로 피고가 된 녹십자 제약회사의 창시자는 시로의 최측근이었던 나이토 료이치이며, 그는 731부대장을 역임한 바 있는 기타노 세이지를 고문으로 두고 있어서, 731부대와 그 연속성을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정부와 일본내 인식 [ 편집 ]

일본 정부 [ 편집 ]

일본 정부는 731부대의 실체를 부인해 오다가 50년이 지난 후에야 부대 존재를 시인하였다. 하지만 1만 명의 중국인ㆍ조선족ㆍ연합군 포로를 실험용으로 학살한 만행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발뺌하였고, 옛 부대원들의 증언내용을 확인하는 것 역시 거부하고 있다.

일본내 인식 [ 편집 ]

일본은 역사 수정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특별한 증거가 없다”며 731부대의 인체실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뉴욕에 거주하는 논픽션 작가인 아오키 후키코에 의해 이시이 시로의 일기가 발견되어, 전후나 전시에 그의 행보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언급되고 있다.

일본내 교수들의 학위 취소 요청 [ 편집 ]

2018년 4월에는 일제 강점기에 만주에서 생체·세균실험을 저지른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관계자들에게 교토(京都)대가 의학 박사학위를 수여했다는 것에 반발해 일본 교수들이 학위 취소를 요청하기도 하였다.[28]

또한 2018년 3월에는 1945년에 발표된 <개벼룩을 통한 페스트 매개 가능성>이라는 교토대학교 논문이 731 부대가 자행한 인체 실험일 가능성이 있다는 문제제기가 나왔다. 논문에는 원숭이에게 개벼룩을 옮기자 원숭이가 두통을 느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가츠오 의대 니시야마 명예교수는 “두통의 자세하고 사실적인 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원숭이가 아니라 인간에게 행해진 실험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부대 건물 [ 편집 ]

당시 부대 건물은 전쟁이 끝난 후 중학교로 사용되었으며, 2001년부터는 일제 만행을 고발하는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현재 중국 하얼빈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하얼빈(哈爾賓) 핑팡취(平房區) 신장다제(新疆大街) 25호에는 당시의 현장을 일부 복원시킨 ‘침화일군 제731부대 유적지’(侵華日軍 第七三一部隊 遺跡地)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731부대는 원래 건물 80여 곳에 총면적이 6.1km2였으나 현재는 당시의 본부 건물을 유적지로 복원하였다.

나치의 유대인 강제수용소와의 차이 [ 편집 ]

731부대가 행한 인체실험은 나치의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행해진 인체실험과 자주 비교되는데, 인체실험을 했다는 사실은 같으나 실험을 행한 주체는 차이가 있다. 731부대의 인체실험은 생화학전술의 효과적 운용을 목적으로 군 내에서 조직적으로 실시되었다. 반면 나치의 경우는 수용소 자체는 유대인의 근절을 목적으로 한 시설이었고, 실험도 독일인 의사의 개인적 연구 차원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731부대는 군 조직이고 도쿄의 방역연구소와 연계되어 정보를 공유했으며, 국가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진행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미국 [ 편집 ]

태평양전쟁 이 후, 일본 생물학전 부대로 악명높은 731 부대 부대장인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일본 육군 중장과 그 부하들이 포트 데트릭으로 와서 생물학 무기 개발에 참여했다. 이시이 중장은 한국전쟁 당시 여러번 한국을 방문했었다.[29] 미육군전염병연구소 참조.

참고 자료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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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마루타 최초 확인] 최초 공개 731부대 생체실험 대상된 조선인 마루타 있었다 – “그는 중국 및 소련 공산당 정보요원 심득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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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731부대 모성애 실험 (인체실험 마루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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