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에 대한 기사를 찾고 있습니까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웹사이트에서 이 주제에 대한 전체 정보를 제공합니다 https://c2.chewathai27.com/ 탐색에서: 457+ 당신을 위한 팁. 바로 아래에서 이 주제에 대한 자세한 답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찾고 있는 주제를 더 잘 이해하려면 끝까지 읽으십시오. 더 많은 관련 검색어: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결정되었던 내용 3가지,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찬반,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과,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의의,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요약,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순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평가,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좌익 우익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 나무위키:대문
20 thg 12, 2022 —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 회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세계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논한 …
- Source: namu.wiki
- Views: 76213
- Publish date: 16 hours ago
- Downloads: 55771
- Likes: 557
- Dislikes: 9
- Title Website: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 나무위키:대문
- Description Website: 20 thg 12, 2022 —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 회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세계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논한 …
- Source: Youtube
- Views: 87182
- Date: 23 hours ago
- Download: 97973
- Likes: 8209
- Dislikes: 6
모스크바삼상회의( 三相會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 의정서를 신탁통치에 관한 의정서라고 하지만 신탁통치 실시의 구체적 실행 방법을 결정했다기 보다는 ‘신탁통치 실시방안의 결정 수순’을 대략적으로 규정한 문서에 불과하다. 원래 신탁통치를 실시하려 했다면 그 구체적인 실행안이 분할점령 전에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지침이 없어 곧바로 실행하지도 못하고 미·소는 분할점령을 단행하였다. 그렇다면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있을 정도의 구체적 안을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단지 ‘5개년 이내 4개국 신탁통치안’을 미·소가 조선인·영·중과 협의하여 결정한다는 것 외에는 결정된 것이 없었다. 물론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결정이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구체적 지침 없이 실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위가 열렸으나 국내의 반탁·모스크바결정 노선 대립과 미·소대립에 직면해 앞의 3단계 수순 중 1단계에서 전혀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이 이 문서의 구속력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근거이다.
둘째는 어느 한쪽도 그 실현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으나, 지엽적(枝葉的)인 한국문제를 합의해주고 보다 중요한 중국·일본문제에서 많은 것을 얻거나 미·소 화해분위기를 먼저 해쳤다는 비난을 듣기 싫어 큰 고려 없이 합의했다는 설명이다. 만약 그렇다면 미·소는 각각 실현가능성 있는 대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인데, 이것은 미·소 합의가 전제되지 않은 단독행동으로서의 ‘단정수립’(미국)과 ‘양군철퇴·즉시독립’(소련)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 역시 이후의 역사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 또한 미국의 경우 신탁통치안을 주도했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가 1945년 4월 12일 미·소간의 공식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세상을 뜨고 이 문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트루먼(Harry S. Truman)이 승계한 상태에서 정책결정을 주도하였던 국무부는 루스벨트의 신탁통치안을 무시하면서 신탁통치안과 모순되는 분할점령을 결정하였다.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의 상대적 우세를 보장하여 우호적 정부수립을 기도한 반면, 소련은 국내 정치세력을 끌어들여 우호적 정부수립을 기도하였다. 신탁통치는 형식적으로는 독립의 수단으로 소련에 의하여 규정되었으나, 이는 자신들의 숨은 의도를 은폐하기 위한 위장일 뿐이며, 실질적으로는 우호적 정부수립을 위한 수단 외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미·소 모두 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탁치는 형식 논리에서나 가능했으며, 실제로는 우호적인 정부 수립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탁치를 채택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미·소 모두 탁치를 통해 우호적 정부수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라도 가차 없이 파기시켜 다른 수단을 택할 가능성이 애초부터 있었다. 미·소가 서로 양보하여 타협하지 않는 한 ‘조선을 위한 통한안(統韓案)’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후의 역사(1947년)에서 미국의 일방적 파기에 의하여 현실화되었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外相)이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를 포함한 7개 분야의 의제를 다룬 회의. 키워드. 미국 …
- Source: encykorea.aks.ac.kr
- Views: 2785
- Publish date: 8 minute ago
- Downloads: 62789
- Likes: 7713
- Dislikes: 3
- Title Website: 모스크바삼상회의( 三相會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Description Website: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外相)이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를 포함한 7개 분야의 의제를 다룬 회의. 키워드. 미국 …
18-1 광복~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 18강 광복~6·25 전쟁|2021 대비 수능개념
- Source: Youtube
- Views: 2266
- Date: 2 hours ago
- Download: 94881
- Likes: 4033
- Dislikes: 6
모스크바삼상회의(─三相會議)
흔히 모스크바의정서 한국조항은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실시에 관한 결정으로 간주되며, 이 의정서대로 따랐으면 통일민족국가가 건설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조항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어느 것 하나 결정되지 않은 휴지조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게 한다.
모스크바의정서의 한국관계 조항은 4개의 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첫째 항부터 인용하여 분석해 보고자 한다.
“첫째, 코리아를 독립국가로 재건하고 또한 민주적 원칙에 바탕을 둔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여건을 창출하기 위하여, 그리고 장기간의 일본지배로 인한 참담한 결과를 가능한 속히 제거하기 위하여, 코리아의 산업과 운수 및 농업 그리고 코리아인의 민족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코리아 민주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위의 첫 번째 항은 미국안에는 없던 다소 선언적인 내용으로서 신탁통치가 실시된다는 언급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독립을 위하여 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이라는 조선민족에 호의적인 내용이다. 따라서 첫 번째 항을 과대평가한다면 모스크바결정은 신탁통치에 관한 의정서가 아니라 독립의 실현방법을 규정한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탁치가 아니라 독립을 위한 임시정부 구성이라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위 조항은 하나의 선언적 수사(rhetoric)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아래와 같이 탁치안도 확정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모스크바의정서의 3대 축인 신탁통치와 독립, 임시정부 구성 등에 관해서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둘째, 코리아임시정부의 구성을 돕기 위하여, 그리고 적절한 방책을 미리 만들기 위하여, 남부코리아의 미군사령부와 북부코리아의 소련군사령부의 대표로 구성되는 공동위원회를 설립할 것이다.”
두 번째 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첫 번째 항에서 규정된 임시정부의 구성이 즉각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이하 공위)라는 기관이 설립된 후 공위의 도움으로 구성된다는 수순이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공위의 임무에 대해서는 세 번째 항에서 설명하고 있다.
“셋째, 코리아 민주임시정부와 민주단체들의 참여 아래, 코리아인의 정치·경제·사회적 진보와 민주적인 자치정부의 발전 및 코리아의 민족적 독립의 달성을 위하여 협력·원조(신탁통치)할 수 있는 방책을 작성하는 것이 공동위원회의 임무이다.”
신탁통치에 대한 언급이 최초로 나오는 세 번째 항에서 탁치는 ‘독립달성의 수단’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공위의 주된 임무는 ‘신탁통치방책의 작성’이며, 두 번째 항 서두에 나와 있는 ‘임시정부 구성을 돕는 것’도 부차적 임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탁통치 실행안의 작성 과정에 대한 기술이 이 의정서의 중요한 줄기를 이루고 있다. 그 첫 번째 과정은 결정의 주체인 공위가 코리아 임시정부와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하여 신탁통치 방안을 작성한다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두 번째 항 둘째 문장과 세 번째 항의 첫째 문장 서두, 둘째 문장 서두에 나온다. 이는 코리아인을 단지 행정관(administrator)이나 고문(consultant)으로 임용할 수 있다는 미국안의 규정보다 코리아인 대중의 참여가 보장된 것으로써 소련 측에 유리한 규정이다.
이상과 같이 신탁통치 실행안의 작성 과정에 대한 기술이 이 의정서의 중요한 줄기를 이루는데, 이를 크게 도식화하면, ① 공위가 임시정부와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하여 탁치방안 작성, ② ‘최고 5개년에 걸친 4개국 탁치 협정’안을 4개국 정부가 심의, ③ 신탁통치협정안을 미·소 정부가 최종 결정한다는 것이 그 수순이다.
의정서의 마지막 항인 네 번째 항은 미·소 사령부간의 긴급회담이 2주일 내로 개최된다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이것 외에는 무엇이 모스크바의정서의 확실한 결정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의정서 자체는 비구체적이며 모호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모스크바회담에서는 ‘최고 5개년에 걸친 4개국 신탁통치’가 실시될 것이라고 막연히 결정되었을 뿐인데, 이의 구체적 실행방법은 미·소가 주체가 되어 조선인과 영·중과는 단지 협의만 하여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스크바회담의 한국문제 해결 방식의 요점이다. 즉 미·소가 결정당사자라는 점을 명확히 하였던 것이다.
이 의정서를 신탁통치에 관한 의정서라고 하지만 신탁통치 실시의 구체적 실행 방법을 결정했다기 보다는 ‘신탁통치 실시방안의 결정 수순’을 대략적으로 규정한 문서에 불과하다. 원래 신탁통치를 실시하려 했다면 그 구체적인 실행안이 분할점령 전에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지침이 없어 곧바로 실행하지도 못하고 미·소는 분할점령을 단행하였다. 그렇다면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있을 정도의 구체적 안을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단지 ‘5개년 이내 4개국 신탁통치안’을 미·소가 조선인·영·중과 협의하여 결정한다는 것 외에는 결정된 것이 없었다. 물론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결정이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구체적 지침 없이 실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위가 열렸으나 국내의 반탁·모스크바결정 노선 대립과 미·소대립에 직면해 앞의 3단계 수순 중 1단계에서 전혀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이 이 문서의 구속력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근거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미국과 소련은 신탁통치를 다르게 규정하고 있었다.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었던 신탁통치를 미국은 불평등한 ‘지배’의 의미가 부각된 ‘정치훈련’의 의미로 받아들인 반면 소련은 평등한 ‘도와줌’의 의미가 부각된 ‘협력·원조’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기본적인 명칭 면에서도 탁치와 후견으로 다르게 표기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개념규정마저 일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모든 번거로운 결정을 이후 개최될 공위에 떠넘겨버렸으니, 한국문제에 관한 한 아무것도 결정이 되지 않은 회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소협력이 공고하다면 결정이 유보된 문제의 해결을 기한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간신히 합의된 결정이 미·소간의 불화에 의하여 실행되지도 못한 채 파기되고 마는 형세가 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계적 냉전 출현의 국지화에 또 한 가지 기여한 것이 반탁·모스크바결정 지지라는 국내 세력의 대립이었다.
그렇다면 미·소가 왜 이렇게 명확한 것 하나 없이 비정상적인 합의에 도달하였는가에 대하여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을 것이며 그에 의거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하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의 숨겨진 의도를 규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두 가지 흥미 있는 추론을 하고자 한다.
첫째 미·소 양국은 탁치의 실시가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속단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신탁통치는 우호적인 정부수립이라는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구체적인 신탁통치안은 미국의 이익에 합치되는 동시에 소련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속셈을 충족하는 것이었다. 어느 한 쪽의 배타적 이익보장이 규정되지 않은 모호한 안이 신탁통치안이었다. 또한 그것이 위임통치처럼 식민지의 변형이 될지 아니면 소련의 주장처럼 독립의 지름길이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신탁통치안은 식민지의 혁명적 민주주의에 정면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건하게 발산시키면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제국적·반식민주의적 정책이었다. 어떻게 보면 제1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패전국 식민지에 적용되었던 식민지 재분할을 위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안’을 미국의 이익에 맞게 변형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임통치나 탁치는 모두 세력확보를 위한 제국주의 정책이라는 면에서는 다를 바 없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는 차별성이 있다. 문호개방적 탁치안은 식민지의 혁명적 기운을 의식하여 위임통치의 구식민주의적 특성을 신식민주의적으로 변화시켜 식민지 민중의 요구에도 타협하면서, 동시에 구식민세력(영국·프랑스·독일)을 견제, 구식민지적 방식을 통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구식민지가 무장력이 필요한 반면, 신탁통치는 별다른 무장력의 지출 없이 보다 넓은 지역을 확보하려는 방안이다.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의 상대적 우세를 보장하여 우호적 정부수립을 기도한 반면, 소련은 국내 정치세력을 끌어들여 우호적 정부수립을 기도하였다. 신탁통치는 형식적으로는 독립의 수단으로 소련에 의하여 규정되었으나, 이는 자신들의 숨은 의도를 은폐하기 위한 위장일 뿐이며, 실질적으로는 우호적 정부수립을 위한 수단 외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미·소 모두 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탁치는 형식 논리에서나 가능했으며, 실제로는 우호적인 정부 수립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탁치를 채택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미·소 모두 탁치를 통해 우호적 정부수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라도 가차 없이 파기시켜 다른 수단을 택할 가능성이 애초부터 있었다. 미·소가 서로 양보하여 타협하지 않는 한 ‘조선을 위한 통한안(統韓案)’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후의 역사(1947년)에서 미국의 일방적 파기에 의하여 현실화되었다.
둘째는 어느 한쪽도 그 실현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으나, 지엽적(枝葉的)인 한국문제를 합의해주고 보다 중요한 중국·일본문제에서 많은 것을 얻거나 미·소 화해분위기를 먼저 해쳤다는 비난을 듣기 싫어 큰 고려 없이 합의했다는 설명이다. 만약 그렇다면 미·소는 각각 실현가능성 있는 대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인데, 이것은 미·소 합의가 전제되지 않은 단독행동으로서의 ‘단정수립’(미국)과 ‘양군철퇴·즉시독립’(소련)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 역시 이후의 역사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 또한 미국의 경우 신탁통치안을 주도했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가 1945년 4월 12일 미·소간의 공식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세상을 뜨고 이 문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트루먼(Harry S. Truman)이 승계한 상태에서 정책결정을 주도하였던 국무부는 루스벨트의 신탁통치안을 무시하면서 신탁통치안과 모순되는 분할점령을 결정하였다.
국무장관 번스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소협력을 위하여 탁치안을 받아들였지만 트루먼과 같이 자신의 아이디어도 아니었으므로 실현가능성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후부터 논의를 주도하게 된 국무부는 탁치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일관적인 행태를 보였다.
첫째와 둘째 가설을 종합하면, 미·소 양국은 그 실현가능성을 높게 보지는 않았으나 신탁통치안이 실현된다면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수립을 가능케 할 것이라고 속단하여 별 다른 고려 없이 합의하였다는 설명이다. 다소 수사적으로 규정한다면 신탁통치안은 ‘동상이몽의 세력확보책’이었다. 신탁통치안의 결정과정부터 미·소는 그 실현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지만 실현을 가로막고 미·소대립을 조장시킨 한 요인은 신탁통치안의 규정이 각자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을 정도로 애매모호하여 구속력을 갖지 못했던 점이다. 즉 동상이몽의 불확실성이 국내 정치세력의 좌우대립과 어우러져 신탁통치안의 폐기를 가중시킨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2차 세계대전 말 연합군은 전후 처리 문제를 위해 카이로회담을 갖고 여기서 일본 패망 후 한국에 대해 적당한 시기까지 신탁통치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후 전쟁이 끝난 1945년 12월 미국 · 영국 ·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 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2] 그리하여 미국의 제임스 번즈, 영국의 어니스트 베빈, 소련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만나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의 회의 후 12월 27일[3]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문제들과 관련한 선언을 발표하였다.[4] 이들 외무 장관들이 서명한 공식 문서인 <미국, 영국, 소련 외무장관 임시회의. 1945년 12월 16~26, 모스크바(INTERIM MEETING OF FOREIGN MINISTERS OF THE UNITED STATES, THE UNITED KINGDOM, AND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MOSCOW, DECEMBER 16-26, 1945)>의 하위 명칭인 <소련, 미국, 영국 외무장관회의 보고서(Report of the Meeting of The Ministers of Foreign Affairs of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The United States of America,The United Kingdom)> 밑으로는 다음과 같은 7조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그 나라를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창조하고 가급적 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공업,교통, 농업과 조선인민의 민족문화의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책을 취할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조선 임시정부 구성을 원조 및 적절한 방책의 초안 구체화를 위하여 남조선 미합중국 사령부, 북조선 소련 사령부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제안서 준비에 대해 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 단체와 협의할 것이다.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서는 공동위원회에 대표를 둔 두 정부의 최후 결정 전에 미ㆍ영ㆍ소ㆍ중 정부의 참작을 위해 제출되겠다. 조선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 발전 및 조선 독립 국가 수립을 돕고 협력(신탁통치)하기 위한 방안을 만드는 것은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 및 조선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 공동위원회가 할 역할이겠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간의 4개국 신탁통치[6] 협약을 작성하는 데 대해 미ㆍ영ㆍ소ㆍ 중 정부와 공동으로 참작할 수 있게 조선 임시 정부와 협의 후 제출되겠다 남북 조선과 관련된 긴급한 제 문제 고려 및 남조선의 미합중국 사령부와 북조선의 소련 사령부 사이의 행정ㆍ경제 문제의 영원한 조화를 확립하는 조치의 구체화를 위해 2주 이내에 미국과 소련 사령부 대표 회의가 소집될 것이다.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三國外相會議) 또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三相會議)는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 영국 · 소련의 …
- Source: ko.wikipedia.org
- Views: 98125
- Publish date: 4 hours ago
- Downloads: 491
- Likes: 8972
- Dislikes: 7
- Title Website: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Description Website: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三國外相會議) 또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三相會議)는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 영국 · 소련의 …
- Source: Youtube
- Views: 55959
- Date: 43 minute ago
- Download: 94987
- Likes: 3284
- Dislikes: 9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三國外相會議) 또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三相會議)는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 영국 · 소련의 외무장관 회의이다. 제2차 세계대전 뒤의 일본 점령지구에 대한 관리 문제를 비롯하여 얄타회담에 따른 대한민국의 독립 문제를 거론하였다.[1]
배경 [ 편집 ]
제2차 세계대전 말 연합군은 전후 처리 문제를 위해 카이로회담을 갖고 여기서 일본 패망 후 한국에 대해 적당한 시기까지 신탁통치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후 전쟁이 끝난 1945년 12월 미국 · 영국 ·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 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2] 그리하여 미국의 제임스 번즈, 영국의 어니스트 베빈, 소련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만나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의 회의 후 12월 27일[3]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문제들과 관련한 선언을 발표하였다.[4] 이들 외무 장관들이 서명한 공식 문서인 <미국, 영국, 소련 외무장관 임시회의. 1945년 12월 16~26, 모스크바(INTERIM MEETING OF FOREIGN MINISTERS OF THE UNITED STATES, THE UNITED KINGDOM, AND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MOSCOW, DECEMBER 16-26, 1945)>의 하위 명칭인 <소련, 미국, 영국 외무장관회의 보고서(Report of the Meeting of The Ministers of Foreign Affairs of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The United States of America,The United Kingdom)> 밑으로는 다음과 같은 7조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그리고 핀란드에 대한 평화조약 준비(I. PREPARATION OF PEACE TREATIES WITH ITALY, ROMANIA, BULGARIA, HUNGARY AND FINLAND,(파리 조약 참고) 일본에 대한 극동 지역 위원회와 연합회의(II. FAR EASTERN COMMISSION AND ALLIED COUNCIL FOR JAPAN) 극동위원회
일본 군정 위원회 한국(III. KOREA) 중국(IV. CHINA) 루마니아 (V. RUMANIA) 불가리아 (VI. BULGARIA) 원자력 에너지의 통제를 위한 미국에 의한 위원회 설립 (VII. THE ESTABLISHMENT BY THE UNITED NATIONS OF A COMMISSION FOR THE CONTROL OF ATOMIC ENERGY)
합의문에서 조선(III. Korea)에 관한 네 문단 [ 편집 ]
1945년 12월 16일 미국 · 영국 · 소련은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26일까지 외무장관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첨예한 대립을 보였으나 결국 의견을 조율하여 같은 해 12월 27일 합의문으로 네 개의 조로 이루어진 ‘미ㆍ영ㆍ소 3국 외무장관 회의 보고서'[5]를 발표했다. 이 문서에서 세 번째 조인 “한국(III.Korea)”에 관한 문단은 네 개 항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속칭〈한국 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이다.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회의 보고서에서 세 나라는 한반도의 정부수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이 중 세 번째 항은 신탁통치안을 담고 있다.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그 나라를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창조하고 가급적 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공업,교통, 농업과 조선인민의 민족문화의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책을 취할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조선 임시정부 구성을 원조 및 적절한 방책의 초안 구체화를 위하여 남조선 미합중국 사령부, 북조선 소련 사령부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제안서 준비에 대해 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 단체와 협의할 것이다.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서는 공동위원회에 대표를 둔 두 정부의 최후 결정 전에 미ㆍ영ㆍ소ㆍ중 정부의 참작을 위해 제출되겠다. 조선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 발전 및 조선 독립 국가 수립을 돕고 협력(신탁통치)하기 위한 방안을 만드는 것은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 및 조선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 공동위원회가 할 역할이겠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간의 4개국 신탁통치[6] 협약을 작성하는 데 대해 미ㆍ영ㆍ소ㆍ 중 정부와 공동으로 참작할 수 있게 조선 임시 정부와 협의 후 제출되겠다 남북 조선과 관련된 긴급한 제 문제 고려 및 남조선의 미합중국 사령부와 북조선의 소련 사령부 사이의 행정ㆍ경제 문제의 영원한 조화를 확립하는 조치의 구체화를 위해 2주 이내에 미국과 소련 사령부 대표 회의가 소집될 것이다.
원문 III. KOREA With a view to the re-establishment of Korea as an independent state, the creation of conditions for developing the country on democratic principles and the earliest possible liquidation of the disastrous results of the protracted Japanese domination in Korea, there shall be set up a 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 which shall take all the necessary steps for developing the industry, transport and agriculture of Korea and the national culture of the Korean people. In order to assist the formation of a provisional Korean government and with a view- to the preliminary elaboration of the appropriate measures, there shall be established a Joint Commission consisting of representatives of the United States command in southern Korea and the Soviet command in northern Korea. In preparing their proposals the Commission shall consult with the Korean democratic parties and social organizations. The recommendations worked out by the Commission shall be presented for the consideration of the Governments of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China, the United Kingdom and the United States prior to final decision by the two Governments represented on the Joint Commission It shall be the task of the Joint Commission, with the participation of the 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 and of the Korean democratic organizations to work out measures also for helping and assisting (trusteeship) the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progress of the Korean people, the development of democratic selfgovernment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national independence of Korea. The proposals of the Joint Commission shall be submitted, following consultation with the provisional Korean Government for the joint consideration of the Governments of the United States,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United Kingdom and China for the working out of an agreement concerning a four-power trusteeship of Korea for a period of up to five years. For the consideration of urgent problems affecting both southern and northern Korea and for the elaboration of measures establishing permanent coordination in administrative-economic matters between the United States command in southern Korea and the Soviet command in northern Korea, a conference of the representatives of the United States and Soviet commands in Korea shall be convened within a period of two weeks.[7]
네 문단으로 이루어진, 조선(Korea)에 관한 결정에서 세 번째 문단은 이른바 ‘신탁통치안’이라 불리는 것이다.
위 모스크바 결정은 임시정부 수립을 선결과제로 제시하였지만, 미국의 신탁통치 제안도 받아들인 일종의 절충안이었다. 모스크바결정은 ‘미·소공동위원회 설치→미·소공동위원회와 한국의 정당·사회단체가 협의하여 임시정부 수립 권고안 제출→4대국 심의→임시정부 수립→임시정부는 미·소공동위원회 밑에서 구체적인 신탁통치 협정의 작성에 참가→4대국의 신탁통치 협정 공동심의’라는 복잡한 절차를 예상하였다. 여기서 임시정부 수립안이나 신탁통치 협정 모두 4대국이 심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임시정부 수립은 특히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의 활동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이러한 다단계 수립절차를 통해 미국측 정책의 기조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8][9]
신탁통치에 대한 한국의 반응 [ 편집 ]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과는 곧바로 한반도에 전해졌으나 좌익과 우익의 극심한 분열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3상회의의 최종결정안이 발표되기 전에 UP와 AP 통신이 1945년 12월 25일자로 “번즈 국무장관이 러시아의 신탁통치안에 반대되는 즉시 독립안을 주장하라는 훈령을 받고 러시아로 갔다 (Secretary of State Byrnes went to Russia reportedly with instructions to urge immediate independence as opposed to the Russian thesis of trusteeship.)”는 내용의 기사를 타전하고[10], ≪동아일보≫등 국내 언론들이 이를 받아 12월 27일자로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라는 내용의 기사를 냈는데 이는 나중에 1946년 1월 24일 소련이 타스통신을 통하여 모스크바 3상회담의 경과와 탁치안의 원래 제안자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오보임이 밝혀졌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합의되었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1945년 12월 28일께부터 처음에는 좌우파 가릴 것없이 모두 강력한 반탁의사를 표명했다. 12월 30일 결성된 임시정부가 주도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에 공산당 당수 박헌영도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고[11], 이튿날인 31일 상무위원(常務委員)에 선정되었다.[12] 12월 29일의 경교장 모임에 참석했던 강원룡 목사의 증언도 있으므로 박헌영의 참여는 사실로 보이며[13], 그 외에도 다수의 좌파 인사가 참여하였다.
하지 장군이 박헌영을 1946년 1월 1일에 만났을 때는 강경한 반탁 입장이었으나 1월 3일 다시 만났을 때는 입장이 정반대로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14]. 1월 2일 공산당중앙위원회가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사항을 지지(찬탁)하기로 결정했는데, 책임비서 박헌영이 주도했을 것이므로 신탁통치에 대한 박헌영의 입장은 1월 2일에 정반대로 바뀐 것이다.[15][16]
지난 연말까지도 반탁을 강력히 표명하던 여러 좌파단체들도 1월 2일을 기점으로 찬탁으로 일제히 바뀌었는데[17], 미군정도 이러한 일에는 소련의 의사가 작용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14]. 좌파들이 찬탁으로 전환한 것은 김일성, 김두봉 등 북한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1월 2일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18] 이 성명서에는 조선민주당 대표 조만식은 참여하지 않았으며, 소련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가 반탁의사를 굽히지 않자 소련은 1월 5일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연금한다.
1월 3일에 예고되었던 좌익들의 반탁집회는 집회 당일날 지도부에 의해 찬탁집회로 돌변하여 진행되어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19][20]
이 시기 우익진영 일반, 그 중에서도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세력은 반탁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8] 실제로 처음부터 강력한 신탁 통치안을 제시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좌익은 처음엔 표명에 미온적이었으나, 나중에 소련측의 요구에 의해 모스크바 회의의 내용의 전문이 공개된 후, 회의의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입장에 섰고, 우익은 즉각적으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서 좌익계열은 임시정부 건설원칙에 강조를 했었으며, 우익계열은 신탁통치 반대에 강조하면서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기타 [ 편집 ]
초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3국 외무장관회의라고 표기되어 있다.[21]
중학교 미래앤 역사2, 비상교육 역사2 교과서에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라고 표기되어있다.
초등학교 사회 5학년 2학기 교과서에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라고 표기되어 있다.[22]
소련의 계획 [ 편집 ]
소련군 태평양 함대에 입대하여 웅진, 나진, 청진 등 상륙작전에 활약하여 적기훈장을 수여하는 등 해방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이후 문화선전성 제1부상(차관에 해당)을 지내기도 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표적 소련파 정상진은 “북한은 해방 후 20년 역사를 위조했다”며 ” 일본군을 내몬 뒤 소련 정부에서 북한 정권 수립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해방 후 원산항(港)에 귀국하는 김일성을 맞으러 간 것도 접니다. 소련은 고려인을 통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어요. 1945년부터 1965년까지 북한에서 발표된 모든 연설문은 다 소련에서 작성됐어요.”라고 폭로했다.[23]
2010년에는 1945년 12월 29일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소련군 진주 후 북한의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등 3개도를 방문조사한 뒤 만든 총 13p 분량의 보고서가 공개되었는데, 보고서 내용에는 258 소총사단장 드미트리예프 대좌는 “조선사람은 35년간 노예로 있었다. 좀 더 노예로 있게 하자”는 말도 남겼다고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24][25]
참고 자료 [ 편집 ]
각주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 똑똑
개념 정리, 수행평가, 그리고 문제 분석까지 제공하는 똑똑 학습 솔루션을 확인해보세요!
한국사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4-1-3. 대한민국의 발전. 8·15 광복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 1945년 12월 미국·영국·소련 3국의 외무 장관이 …
- Source: www.dokdok.co
- Views: 25094
- Publish date: 54 minute ago
- Downloads: 59070
- Likes: 112
- Dislikes: 9
- Title Website: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 똑똑
- Description Website: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4-1-3. 대한민국의 발전. 8·15 광복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 1945년 12월 미국·영국·소련 3국의 외무 장관이 …
보기만 해도 10점 UP! 한국사 벼락치기 8.15 광복과 한반도 정치상황|조선건국준비위원회,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한능검|한국사 정리|한국사탐구생활|에듀윌 한국사능력검정
- Source: Youtube
- Views: 11351
- Date: 23 hours ago
- Download: 69361
- Likes: 7457
- Dislikes: 4
한국사: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한국사
개념 정리, 수행평가, 그리고 문제 분석까지 제공하는 똑똑 학습 솔루션을 확인해보세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 네이버 블로그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들은 모스크바에 모여 일본 점령 지구에 대한 관리 문제, 한반도의 독립 문제를 의논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
11 thg 6, 2017 —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 1. 조선을 독립 국가로 재건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며 일본의 가혹한 정치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
- Source: m.blog.naver.com
- Views: 16109
- Publish date: 7 hours ago
- Downloads: 8901
- Likes: 4487
- Dislikes: 6
- Title Website: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 네이버 블로그
- Description Website: 11 thg 6, 2017 —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 1. 조선을 독립 국가로 재건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며 일본의 가혹한 정치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
62. 한국사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 Source: Youtube
- Views: 10507
- Date: 24 minute ago
- Download: 69977
- Likes: 2109
- Dislikes: 9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들은 모스크바에 모여 일본 점령 지구에 대한 관리 문제, 한반도의 독립 문제를 의논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The Moscow … – 금성출판사 :: 티칭백과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김구 등 민족주의 세력을 비롯한 많은 사람은 신탁 통치를 민족의 자주권 부정이라고 여겨 반탁 운동을 벌였다. 특히 우익인 한민당의 입장을 대변하였던 당시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이라고 보도하여 사회적으로 반탁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이러한 보도는 미국과 소련의 입장을 정확히 반대로 보도한 오보였으며, 결정서의 내용을 왜곡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12월 16일부터 27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무장관 회의가 열렸다. 이는 종전 후 계속된 강대국 간 협의의 연장선에서 열린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미국은 임시 정부 수립 없이 5년에서 최대 10년 동안 4개국이 신탁 통치하자고 제안하였고, 소련은 임시 정부 수립과 미·공동 위원회 개최, 조선의 정당, 사회 단체의 참여를 제안하였다.
미국과 소련은 첨예한 대립을 보였으나 결국 의견을 조율하여 12월 27일 발표하였다. 주요 내용은 민주주의적 원칙 아래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임시 정부를 설치할 것, 임시 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해 미ㆍ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할 것, 미ㆍ영ㆍ소ㆍ중은 한국을 최고 5년 동안 신탁 통치할 것, 미ㆍ소 공동 위원회는 임시 정부 수립을 준비하기 위해 민주적 정당ㆍ사회단체와 협의할 것 등이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The Moscow Conference of Foreign Ministers. 트위터 페이스북 메일 프린트 url복사. 1945년 12월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하여 …
- Source: dic.kumsung.co.kr
- Views: 76286
- Publish date: 21 minute ago
- Downloads: 38972
- Likes: 7036
- Dislikes: 4
- Title Website: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The Moscow … – 금성출판사 :: 티칭백과
- Description Website: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The Moscow Conference of Foreign Ministers. 트위터 페이스북 메일 프린트 url복사. 1945년 12월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하여 …
- Source: Youtube
- Views: 64350
- Date: 2 hours ago
- Download: 93642
- Likes: 2117
- Dislikes: 2
금성출판사 :: 티칭백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12월 16일부터 27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무장관 회의가 열렸다. 이는 종전 후 계속된 강대국 간 협의의 연장선에서 열린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미국은 임시 정부 수립 없이 5년에서 최대 10년 동안 4개국이 신탁 통치하자고 제안하였고, 소련은 임시 정부 수립과 미·공동 위원회 개최, 조선의 정당, 사회 단체의 참여를 제안하였다.
미국과 소련은 첨예한 대립을 보였으나 결국 의견을 조율하여 12월 27일 발표하였다. 주요 내용은 민주주의적 원칙 아래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임시 정부를 설치할 것, 임시 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해 미ㆍ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할 것, 미ㆍ영ㆍ소ㆍ중은 한국을 최고 5년 동안 신탁 통치할 것, 미ㆍ소 공동 위원회는 임시 정부 수립을 준비하기 위해 민주적 정당ㆍ사회단체와 협의할 것 등이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김구 등 민족주의 세력을 비롯한 많은 사람은 신탁 통치를 민족의 자주권 부정이라고 여겨 반탁 운동을 벌였다. 특히 우익인 한민당의 입장을 대변하였던 당시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이라고 보도하여 사회적으로 반탁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이러한 보도는 미국과 소련의 입장을 정확히 반대로 보도한 오보였으며, 결정서의 내용을 왜곡한 것이었다.
좌익 세력도 처음에는 신탁 통치에 반대하였으나, 나중에 소련 측의 요구에 의해 모스크바 회의의 내용의 전문이 공개된 후, 회의의 결과를 총체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입장에 섰다. 여기서 좌익 계열은 임시 정부 건설 원칙에 강조를 하였으며, 우익 계열은 신탁 통치 반대에 강조하였다. 이러한 우익과 좌익의 입장 차이는 격렬한 대립으로 이어졌다.
———————————————————————————
* 본 게시물의 그림은 독립기념관에서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웹툰으로 보는 독립운동사: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용하였습니다.
남북관계 지식사전 – 통일부 국립통일교육원
모스크바 3상회의?는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개최되었 으며, 그 결과 모스크바 협정이 체결되었다. 모스크바 협정에서는 한반도의 처리문제가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고 결정되었 다. ① 한국을 독립국으로 재건 발전시키기 위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②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돕기 위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구성한다, ③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완전 독립을 목적으로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 기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하며 미·소 공동위원회?가 구체안을 건의한다, ④ 주한 미·소 양군 사령부의 대표 간 회의를 2주일 이내에 소집한 다는 등을 담고 있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모스크바 협정의 핵심은 한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해 나가되 이를 지원 보장하기 위해 4대국이 5년 이내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내용이 알려지면서 한반도는 격렬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김구 등 임시정부 세력을 중심으로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반탁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이승만, 한민당 등 대부분의 우익세력이 이에 가세하였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도 초기에 반탁의 입장이었으나 박헌영이 평양을 방문한 후 찬탁으로 돌아섰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에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전쟁종결 후 처리해야 할 국제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1945년 2월의 얄타회담과 7월의 포츠담회담에 이어 9월 런던에서 미·영·불·중·소 5국 외상회의가 열렸고, 12월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 외상회의가 열렸다. 이 모스크바 3 상회의는 주로 극동 지역의 처리문제, 특히 일본에서 분리된 지역의 관리와 한국의 독립문제 등이 토의되었다.
이와 같이 남한에서는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우익 진영이 반탁으로, 좌익 진영이 찬탁으로 갈려 대립이 격화되었다. 북한에서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면서 소련군이 조만식 등 민족주의 세력을 제거하고 김일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공산 정권 수립의 길로 나아갔다. 모스크바 3상회의?를 통한 신탁통치 결정은 민족 내부의 분열을 심화시킴으로써 한반도는 분단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945년 12월 16~26일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 외상회의가 열려 극동지역의 전후 처리문제를 협의하였다. 여기서 임시정부 수립, 미·소공동위원회 구성, 5년의 신탁통치 등이 결정되었다. 이 신탁통치 문제로 민족 내부 분열이 심화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1945년 12월 16~26일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 외상회의가 열려 극동지역의 전후 처리 …
- Source: cloud.uniedu.go.kr
- Views: 89253
- Publish date: 14 hours ago
- Downloads: 65391
- Likes: 4352
- Dislikes: 8
- Title Website: 남북관계 지식사전 – 통일부 국립통일교육원
- Description Website: 모스크바 3상회의? 1945년 12월 16~26일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 외상회의가 열려 극동지역의 전후 처리 …
- Source: Youtube
- Views: 42431
- Date: 20 hours ago
- Download: 101817
- Likes: 3220
- Dislikes: 9
국립통일교육원>자료마당>남북사전>남북관계 지식사전
1945년 12월 16~26일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 외상회의가 열려 극동지역의 전후 처리문제를 협의하였다. 여기서 임시정부 수립, 미·소공동위원회 구성, 5년의 신탁통치 등이 결정되었다. 이 신탁통치 문제로 민족 내부 분열이 심화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에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전쟁종결 후 처리해야 할 국제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1945년 2월의 얄타회담과 7월의 포츠담회담에 이어 9월 런던에서 미·영·불·중·소 5국 외상회의가 열렸고, 12월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 외상회의가 열렸다. 이 모스크바 3 상회의는 주로 극동 지역의 처리문제, 특히 일본에서 분리된 지역의 관리와 한국의 독립문제 등이 토의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는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개최되었 으며, 그 결과 모스크바 협정이 체결되었다. 모스크바 협정에서는 한반도의 처리문제가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고 결정되었 다. ① 한국을 독립국으로 재건 발전시키기 위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②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돕기 위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구성한다, ③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완전 독립을 목적으로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 기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하며 미·소 공동위원회?가 구체안을 건의한다, ④ 주한 미·소 양군 사령부의 대표 간 회의를 2주일 이내에 소집한 다는 등을 담고 있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모스크바 협정의 핵심은 한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해 나가되 이를 지원 보장하기 위해 4대국이 5년 이내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내용이 알려지면서 한반도는 격렬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김구 등 임시정부 세력을 중심으로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반탁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이승만, 한민당 등 대부분의 우익세력이 이에 가세하였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도 초기에 반탁의 입장이었으나 박헌영이 평양을 방문한 후 찬탁으로 돌아섰다.
이와 같이 남한에서는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우익 진영이 반탁으로, 좌익 진영이 찬탁으로 갈려 대립이 격화되었다. 북한에서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면서 소련군이 조만식 등 민족주의 세력을 제거하고 김일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공산 정권 수립의 길로 나아갔다. 모스크바 3상회의?를 통한 신탁통치 결정은 민족 내부의 분열을 심화시킴으로써 한반도는 분단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주제에 대한 관련 정보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Bing에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주제에 대한 최신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주제에 대한 기사 보기를 마쳤습니다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이 기사가 유용했다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이 주제와 관련하여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결정되었던 내용 3가지,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찬반,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과,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의의,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요약,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순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평가,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좌익 우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