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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 민권 운동 – 나무위키:대문
25 thg 12, 2022 — 1950~60년대에 일어난 미국 흑인들의 차별철폐 및 투표권 획득을 위한 민권 운동이다.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20세기의 대표적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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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Website: 미국 흑인 민권 운동 – 나무위키:대문
- Description Website: 25 thg 12, 2022 — 1950~60년대에 일어난 미국 흑인들의 차별철폐 및 투표권 획득을 위한 민권 운동이다.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20세기의 대표적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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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앨라배마 NAACP의 의장인 E. D. 닉슨 (E.D.Nixon)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흑인들의 파업과 버스 승차거부를 주장하였고, 흑인교회 목사들과 함께 몽고메리 개선협회(Montgomery Improvement Association. MIA)를 구성하였고,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을 협회의 의장으로 추천하였다. 흑인들이 승차거부에 동참한 지 3일 후, 마틴 루터 킹은 몽고메리의 시장 W. A. 게일(W.A Gayle)을 만나 합의를 도출 하려 했으나 성과가 없었고, 백인들은 흑인들의 요구를 무시했다. 1956년 1월말, 흑인들의 버스승차 거부운동이 사그라지지 않자 게일 시장은 강경책을 선언하였고 흑인들을 억압하는 공식적인 정책이 시행되었다. 그 결과 승차거부에 동참한 많은 흑인들은 일터에서 쫓겨났다. 버스에서 흑인과 백인의 분리를 지속하려는 시당국에 대해 연방 지방 법원은 이러한 행위는 위헌이라 규정했고, 이에 시 당국은 대법원에 즉시 항소하였다. 이는 “브로더 대 게일” (Browder v. Gayle) 재판으로 불린다. 그리하여 1956년 11월, 미합중국 대법원은 연방 지방 법원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판결을 내리게 되었고 1년이 넘는 투쟁 끝에 흑인들은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울워스 식당에서의 연좌 운동이 시작된 지 2주일 만에 운동은 남부 5개 주 15개 도시로 빠르게 퍼져 갔다. 1960년 4월 21일, 45명의 학생들이 권리 침해 및 불법침입의 이유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여러 상점을 상대로 거대한 불매운동이 실시되었다. 1960년 4월에 이르러 이 운동은 78개 남부도시와 주변 흑인 공동체로 퍼져 나가 2,000여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고 1년 후에는 그 수가 2배로 늘었다. 학생들의 연좌농성이 증가하자 인종주의자들과의 긴장이 증폭되어 폭력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1960년 10월, 루서 킹과 36명의 학생들이 백화점에서 연좌 농성을 하던 중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이에 항의하는 더 많은 흑인 시위대가 운집하였다. 이 과정에서 57명이 구속되었다. 1961년에 들어서도 농성과 체포는 계속되었고, 결국 1961년 9월 27일 애틀란타에서도 흑백분리가 철폐되기 시작했지만, 흑백분리가 깊게 자리한 몇몇 남부지역에서는 흑인들이 만족할 만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미대륙에 처음 흑인이 들어 온 것은 1619년 네덜란드 국적의 선박이 버지니아 식민지에 20여 명의 흑인을 태우고 온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 흑인이 처음부터 노예였는지, 아니면 단순한 계약 노동자로 노역에 종사했는지는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1863년 링컨(Lincoln)의 노예해방선언 이후에도 흑인들은 백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이들은 오랜 기간동안 백인들의 차별과 압박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해왔다. 인간으로서의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했으며, 투표권 역시 갖지 못했다. 그 결과 이러한 차별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의 주체성을 찾기 위해 흑인들은 195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백인과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비폭력적인 인권운동을 펼쳤다.
흑인인권운동은 미국사회에서 흑인에 대한 백인의 차별과 억압에 대항한 흑인들이 자신들의 주체적인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벌이는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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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Website: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Description Website: 흑인인권운동은 미국사회에서 흑인에 대한 백인의 차별과 억압에 대항한 흑인들이 자신들의 주체적인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벌이는 운동이다.
EBS 클립뱅크(Clipbank) – 흑인들의 인권 찾기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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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 운동(African-American Civil Rights Movement)은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미국의 흑인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시민권 신청과 인종 차별의 해소를 요구한 대중 운동이다. 일반적으로 1954년, 1955년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과 로자 파크스에 의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에 따라 결실을 맺었다.
흑인인권운동은 미국사회에서 흑인에 대한 백인의 차별과 억압에 대항한 흑인들이 자신들의 주체적인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벌이는 운동이다.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흑인인권운동 [ 편집 ]
미대륙에 처음 흑인이 들어 온 것은 1619년 네덜란드 국적의 선박이 버지니아 식민지에 20여 명의 흑인을 태우고 온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 흑인이 처음부터 노예였는지, 아니면 단순한 계약 노동자로 노역에 종사했는지는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1863년 링컨(Lincoln)의 노예해방선언 이후에도 흑인들은 백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이들은 오랜 기간동안 백인들의 차별과 압박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해왔다. 인간으로서의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했으며, 투표권 역시 갖지 못했다. 그 결과 이러한 차별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의 주체성을 찾기 위해 흑인들은 195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백인과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비폭력적인 인권운동을 펼쳤다.
주요 운동 [ 편집 ]
버스 승차 거부운동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입니다.
발단 [ 편집 ]
1950년 대 당시 미국사회는 백인과 흑인의 구분이 뚜렷하여 버스나 벤치와 같은 공공장소에서 백인과 흑인의 전용칸이 따로 존재했다. 이 사건은 1955년 12월,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버스 안의 흑인칸이 만석이되어 백인 전용 칸에 앉아 있었다. 버스 기사는 그녀에게 흑인 전용 칸으로 옮겨가라고 하였으나 흑인 전용칸은 만석이었기에 그녀는 옮겨가지 않았다. 그 결과 그녀는 ‘흑백 인종분리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전개 [ 편집 ]
앨라배마 NAACP의 의장인 E. D. 닉슨 (E.D.Nixon)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흑인들의 파업과 버스 승차거부를 주장하였고, 흑인교회 목사들과 함께 몽고메리 개선협회(Montgomery Improvement Association. MIA)를 구성하였고,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을 협회의 의장으로 추천하였다. 흑인들이 승차거부에 동참한 지 3일 후, 마틴 루터 킹은 몽고메리의 시장 W. A. 게일(W.A Gayle)을 만나 합의를 도출 하려 했으나 성과가 없었고, 백인들은 흑인들의 요구를 무시했다. 1956년 1월말, 흑인들의 버스승차 거부운동이 사그라지지 않자 게일 시장은 강경책을 선언하였고 흑인들을 억압하는 공식적인 정책이 시행되었다. 그 결과 승차거부에 동참한 많은 흑인들은 일터에서 쫓겨났다. 버스에서 흑인과 백인의 분리를 지속하려는 시당국에 대해 연방 지방 법원은 이러한 행위는 위헌이라 규정했고, 이에 시 당국은 대법원에 즉시 항소하였다. 이는 “브로더 대 게일” (Browder v. Gayle) 재판으로 불린다. 그리하여 1956년 11월, 미합중국 대법원은 연방 지방 법원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판결을 내리게 되었고 1년이 넘는 투쟁 끝에 흑인들은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성과 [ 편집 ]
몽고메리의 버스 승차거부 운동은 특히 인종차별이 심한 남부지역에서 흑인들의 조직된 시위를 통하여 그들이 원하는 바를 성취해낼 수 있었다는 본보기가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흑인들은 그들의 인권과 자유를 되찾기 위해 조직적인 대중시위를 펼치게 되었다.
싯인 운동 [ 편집 ]
발단 [ 편집 ]
1960년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그린스보로에 있는 흑인 대학신입생 4명은 백인들만 식사할 수 있는 울워스 식당에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식당에서 그들의 주문은 거절당하였으며, 그들이 식당을 떠나려 하지 않자 주인은 식당 문을 닫아 버렸다. 다음날 그들은 다시 그 식당으로 갔고, 계속해서 이 일이 반복되어 다른 흑인들도 그들의 행동에 동참했다.
전개 [ 편집 ]
울워스 식당에서의 연좌 운동이 시작된 지 2주일 만에 운동은 남부 5개 주 15개 도시로 빠르게 퍼져 갔다. 1960년 4월 21일, 45명의 학생들이 권리 침해 및 불법침입의 이유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여러 상점을 상대로 거대한 불매운동이 실시되었다. 1960년 4월에 이르러 이 운동은 78개 남부도시와 주변 흑인 공동체로 퍼져 나가 2,000여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고 1년 후에는 그 수가 2배로 늘었다. 학생들의 연좌농성이 증가하자 인종주의자들과의 긴장이 증폭되어 폭력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1960년 10월, 루서 킹과 36명의 학생들이 백화점에서 연좌 농성을 하던 중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이에 항의하는 더 많은 흑인 시위대가 운집하였다. 이 과정에서 57명이 구속되었다. 1961년에 들어서도 농성과 체포는 계속되었고, 결국 1961년 9월 27일 애틀란타에서도 흑백분리가 철폐되기 시작했지만, 흑백분리가 깊게 자리한 몇몇 남부지역에서는 흑인들이 만족할 만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 운동은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미국의 흑인 이 시민권 신청과 인종 차별의 해소를 요구한 대중 운동이다. 일반적으로 1954년, 1955년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과 로자 파크스에 의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흑인인권운동은 미국사회에서 흑인에 대한 백인의 차별과 억압에 대항한 흑인들이 자신들의 주체적인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벌이는 운동이다. 1950년대 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에 따라 결실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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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에 따라 결실을 맺었다. 흑인인권운동은 미국사회에서 흑인에 대한 백인의 차별과 억압에 대항한 흑인들이 자신들의 주체적인 인권을 보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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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Website: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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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 — Google Arts & Culture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 운동은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미국의 흑인 이 시민권 신청과 인종 차별의 해소를 요구한 대중 운동이다. 일반적으로 1954년, 1955년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과 로자 파크스에 의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에 따라 결실을 맺었다.
흑인인권운동은 미국사회에서 흑인에 대한 백인의 차별과 억압에 대항한 흑인들이 자신들의 주체적인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벌이는 운동이다. 1950년대 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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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루이스: 흑인 인권운동 거물, 향년 80세의 나이로 타계 – BBC
19 thg 7, 2020 — 흑인 인권 운동 지도자이자 이후 미국 민주당 하원 의원으로 활동했던 존 루이스가 향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루이스는 마틴 루터 킹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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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 역사의 달③] 흑인 민권 운동 이야기 – 이코노미21
버스에서 끝내 자리 양보를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 했던 로자 파크스, 기차에서 일등석 티켓을 끊었다는 이유로 쫓겨났지만 끝까지 굴하지 않았던 아이다. 이 둘은 모두 비합리적인 상황에서 저항했고 변화를 꿈꾸었던 흑인 여성운동가들이었다. 또한 이들을 비롯하여 흑인들의 투표권을 요구하며 비폭력 저항주의로 거리 행진을 했던 마틴 루터킹(Martin Luther King) 그리고 넓은 범위에서 활동한 급진적 흑인해방운동가 맬컴 엑스(Malcolm X)까지. 이들을 비롯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투쟁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걸고 민권 운동을 해나갔다. 결국 수많은 이들의 민권 운동은 인종분리를 종식시키는 ‘민권법’과 투표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투표권법’을 이끌어냄으로써 흑인 차별 역사의 기념비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었다.
우리는 이러한 ‘인종분리’를 흑인 차별 역사를 그려낸 영화들을 통해서 접할 수 있다. 미국 남부 흑인 가정부들의 애환과 연대를 다룬 영화 헬프(The Help, 2011), 미국 NASA의 유인 우주 탐사 계획에서 중요한 업적을 세웠지만 조명 받지 못했던 흑인 여성과학자들이 나오는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2016)가 바로 그러하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는 흑인 여성이 지정된 흑인 전용 화장실을 사용하면서 느껴야 했던 고충과 불합리함을 자연스럽게 담아내었다. 지금 보면 이해하기 힘든 황당한 장면이지만 그 당시 미국사회에서는 합법적 정책이라는 미명하에 숨 쉬듯 당연하게 이루어진 일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인종분리가 주는 불합리한 차별에 맞서 미국에서는 흑인 민권 운동이 일어난다.
1955년 12월 로자 파크스(Rosa Parks)는 직장에서 일을 끝내고 버스에 앉아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버스에 백인들이 탔는데 때마침 앉을 자리가 부족해진다. 이 때 로자 파크스는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것을 요구 받는다. 사람이 많을 경우 유색인은 백인에게 무조건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것이 그 당시의 법과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색인종이 유색인 전용 좌석에 앉아 있어도 말이다.) 이에 로자 파크스는 끝까지 양보를 거부하였고 결국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흑인들은 로자 파크스의 재판 날을 시작으로 ‘버스 안타기 운동’을 일으킨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으로 부르는 이 사건은 수많은 흑인들이 민권운동에 동참할 수 있게 만드는 부싯돌이 되었다.
10 thg 11, 2020 — 흑인 민권 운동(Civil Rights Movement)이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미국의 흑인들이 인권 탄압에 대항하여 벌인 진취적인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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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Website: 10 thg 11, 2020 — 흑인 민권 운동(Civil Rights Movement)이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미국의 흑인들이 인권 탄압에 대항하여 벌인 진취적인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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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 역사의 달③] 흑인 민권 운동 이야기
1955년 로자 파크스 사건을 계기로 흑인 민권 운동 시작돼
아이다 B.웰스, 첫 흑인 민권운동가이자 여성참정권운동가
2019년 시카고 시내에 흑인 여성 운동가 아이다 이름 붙인 도로 만들어져
‘미국 흑인 역사의 달’ 기획기사는 3번에 걸쳐 연재됩니다. 미국의 아픈 역사로 새겨진 흑인 노예,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인종차별 문제의 출발점이기도 한 흑인 역사와 그들의 삶과 애환을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번 글은 연재 마지막회입니다. – 편집자 주
① 2020년 2월 미국 흑인 역사의 달, 미국 노예 무역 이야기
② 2020년 2월 미국 흑인 역사의 달, 미국 노예 해방 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러스
③ 2020년 2월 미국 흑인 역사의 달, 흑인 민권 운동 이야기
미국 남부의 인종 분리 정책
1865년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흑인들에 대한 차별은 그 후에도 오랜 시간 함께 했다.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시행됐던 짐 크로 법(Jim Crow laws)은 미국 남부의 모든 공공기관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시켰던 인종 분리 정책이다. 이 법에 따라 흑인이 버스에 타면 오로지 흑인 전용 좌석에만 앉아야 했고 화장실 역시 백인과 따로 사용해야 했다. 이처럼 미국 남부 사회에서는 대중교통, 학교, 식당, 식수대와 같은 모든 공공시설에서 흑인들에 대한 분리가 철저히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러한 ‘인종분리’를 흑인 차별 역사를 그려낸 영화들을 통해서 접할 수 있다. 미국 남부 흑인 가정부들의 애환과 연대를 다룬 영화 헬프(The Help, 2011), 미국 NASA의 유인 우주 탐사 계획에서 중요한 업적을 세웠지만 조명 받지 못했던 흑인 여성과학자들이 나오는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2016)가 바로 그러하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는 흑인 여성이 지정된 흑인 전용 화장실을 사용하면서 느껴야 했던 고충과 불합리함을 자연스럽게 담아내었다. 지금 보면 이해하기 힘든 황당한 장면이지만 그 당시 미국사회에서는 합법적 정책이라는 미명하에 숨 쉬듯 당연하게 이루어진 일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인종분리가 주는 불합리한 차별에 맞서 미국에서는 흑인 민권 운동이 일어난다.
흑인 민권 운동(Civil Rights Movement)
흑인 민권 운동(Civil Rights Movement)이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미국의 흑인들이 인권 탄압에 대항하여 벌인 진취적인 운동이다. 이는 미국 남부 앨라바마 주의 도시 몽고메리에서 한 흑인 여성이 백인에게 버스 자리 양보를 거부했던 사건을 계기로 그 불씨가 타오르게 된다.
1955년 12월 로자 파크스(Rosa Parks)는 직장에서 일을 끝내고 버스에 앉아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버스에 백인들이 탔는데 때마침 앉을 자리가 부족해진다. 이 때 로자 파크스는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것을 요구 받는다. 사람이 많을 경우 유색인은 백인에게 무조건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것이 그 당시의 법과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색인종이 유색인 전용 좌석에 앉아 있어도 말이다.) 이에 로자 파크스는 끝까지 양보를 거부하였고 결국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흑인들은 로자 파크스의 재판 날을 시작으로 ‘버스 안타기 운동’을 일으킨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으로 부르는 이 사건은 수많은 흑인들이 민권운동에 동참할 수 있게 만드는 부싯돌이 되었다.
로자 파크스(Rosa Parks)
시카고 중심지에 흑인 여성 운동가의 이름을 딴 길이 생기다 – 아이다 B. 웰스 길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의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를 거부했던 날로부터 약 80년 전, 스물두 살의 아이다는 1884년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흑인이 일등석티켓을 끊고 기차를 탔다’는 이유로 기차에서 끌려 나가게 된다.
2019년 2월 시카고 다운타운 주요 거리에 흑인 여성 운동가 아이다의 이름이 붙여졌다. 시카고 중심지를 동서로 관통하는 이 도로는 ‘아이다 B. 웰스 길’ (Ida B. Wells Drive)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이는 이곳 시카고에 흑인 여성의 이름을 딴 도로가 생긴 첫 번째 사례이다.
아프리카계 흑인 아이다 B.웰스(Ida B. Wells)는 미국의 민권운동가, 교육자, 저널리스트, 여성참정권운동가이다. 1862년 미국 미시시피 주에서 노예로 태어난 그녀는 생후 6개월 후 노예제 폐지에 따라 자유인의 몸이 된다. 그러나 아이다 역시 흑인으로 살아가면서 인종적 편견과 수많은 차별에 직면해야 했다.
1884년 스물두살의 아이다는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흑인이 일등석티켓을 끊고 기차를 탔다’는 이유로 기차에서 끌려 나가게 된다. 아이다는 이 일을 소송에 걸었고 500달러의 손해 배상금을 받으며 사건은 승리로 종료되는 듯했다. 그러나 결국 테네시 대법원에서 그녀의 행동은 유죄로 판결이 뒤집어지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이다는 사법 제도에 심각한 실망을 느끼게 된다. 이후 아이다는 프리 스피치 앤드 헤드라이트(Free Speech and Headlight)라는 작은 신문사를 운영하며 기자로서 미국 남부의 인종 차별에 대한 여러 기사를 쓰기 시작한다.
아이다는 멤피스에서 공립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는데 이 때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흑인 차별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다가 해고되기도 한다. 1893년 시카고로 온 그녀는 시카고에서 최초의 흑인 신문인 시카고 컨서베이터(Chicago Conservator)를 설립하여 언론 활동의 끈을 이어 나간다.
아이다 B. 웰스-시카고 역사 박물관에서 촬영.
1896년 아이다는 전미 유색 여성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Colour Women)를 비롯하여 여러 민권 단체를 설립하며 여성 참정권 운동에 공격적인 열정을 쏟아 붓는다. 그 당시 여성은 여전히 주와 연방 차원에서 입법부에 투표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13년 그녀는 시카고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의 일환으로 알파 참정권 클럽(Alpha Suffrage Club)을 설립했다. 그리고 1920년 여성의 참정권이 실현되기까지 아이다가 설립한 알파 참정권 클럽은 여성 참정권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910년 아이다는 미국 남부의 농촌에서 시카고로 온 가난한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을 돕기 위해 흑인 유대 연합(Negro Fellowship League)을 설립했으며 시카고에서 최초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보호관찰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1930년 아이다는 여든 여덟 살 때, 일리노이 주 상원 의원에 출마했으며 이는 공직에 출마한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당선에는 실패한다.) 그리고 1931년 아이다는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6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이처럼 아이다는 언제나 잠재적인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글과 연설을 통해 흑인 인권 문제와 여성의 정치권 제한에 항의하며 맞서 나간 흑인 여성 운동가였다. 때문에 평등한 사회를 향해 싸워나갔던 그녀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현재 미국 저널리즘에서 유색인들의 기회 참여를 격려하는 권위 있는 상을 아이다 웰즈 상(Ida B. Wells Award)이라 부른다. 또한 캘리포니아 주의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주의 자메이카와 같은 미국의 여러 곳에서 아이다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와 고등학교가 생겨나기도 했다.
모두의 투쟁
버스에서 끝내 자리 양보를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 했던 로자 파크스, 기차에서 일등석 티켓을 끊었다는 이유로 쫓겨났지만 끝까지 굴하지 않았던 아이다. 이 둘은 모두 비합리적인 상황에서 저항했고 변화를 꿈꾸었던 흑인 여성운동가들이었다. 또한 이들을 비롯하여 흑인들의 투표권을 요구하며 비폭력 저항주의로 거리 행진을 했던 마틴 루터킹(Martin Luther King) 그리고 넓은 범위에서 활동한 급진적 흑인해방운동가 맬컴 엑스(Malcolm X)까지. 이들을 비롯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투쟁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걸고 민권 운동을 해나갔다. 결국 수많은 이들의 민권 운동은 인종분리를 종식시키는 ‘민권법’과 투표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투표권법’을 이끌어냄으로써 흑인 차별 역사의 기념비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었다.
마틴 루터킹(사진 왼쪽), 맬컴 엑스의 어록(사진 오른쪽)
“I felt that one had better die fighting against injustice than to die like a dog or a rat in a trap.”
― Ida B. Wells
덫에 걸린 개나 쥐처럼 죽는 것보다 불의와 싸우는 것이 더 낫습니다. – 아이다 B. 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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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 국가인권위원회
미국 사회에 플로이드와 같은 사망 사건이 발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이처럼 대규모로, 오랫동안 이어진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시민들이 중심이 된 시위는 다양하고 의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지난 6월 초 트위터에는 흑인 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을 막아선 백인 소녀의 영상이 공개되면서 화제가 됐다. 보호대로 무장한 경찰이 진을 치고 다가오자 한 백인 소녀가 흑인 소년을 지키기 위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경찰이 몸을 일으키고 거세게 밀고 들어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흑인 소년을 지켜내 뭉클함을 자아내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행동은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힘이 된다. 우리는 수많은 역사에서 그것을 배웠고, 또 목격했다. 플로이드의 죽음이 불씨가 된 대규모 인종차별 철폐 운동으로 인해 사회 곳곳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미 항공우주국 NASA는 워싱턴DC의 본부 명칭을 메리 W. 잭슨으로 바꿨다. NASA 최초의 흑인 여성 공학자다. 페이스북은 트럼프 대통령이 플로이드 사망에 항의하는 시위자를 ‘폭도’라고 지칭하는 글을 방치해 디즈니, 삼성전자 등을 비롯한 200여 곳의 기업으로부터 광고 불매에 시달리고 있다.
사람들은 온라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의미의 ‘Black Lives Matter(BLM)’라는 문장을 해시태그로 달며 인종차별에 대해 분노했다. 학교와 공원, 거리 곳곳에 시민들이 모여 한쪽 무릎을 꿇고 다른 쪽 팔을 치켜 올리며 일제히 “Black Lives Matter.”를 외쳤다. 미국 50개 주 전역의 2,000개 이상 도시에서 크고 작은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열렸다. 경찰도 이에 동참했으며 조 바이든 전 미국 부통령과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등 지도자도 동참했다.
미국의 흑인민권운동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하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이 자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백인 경찰의 흑인 과잉 진압과 그에 따른 사망이 빈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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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 흑인 인권 운동! (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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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 인권 웹진
미국의 흑인민권운동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하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이 자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백인 경찰의 흑인 과잉 진압과 그에 따른 사망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FBI(미국연방수사관) 조사 결과 지난 2018년 미국에서 발생한 증오 범죄 중 흑인이 범죄의 대상이 된 경우가 46.9%로 가장 많았다. 지금, 이 현실에 변화가 일고 있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지난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비무장 상태였던 플로이드는 경찰의 무릎에 목이 깔린 채 “숨을 쉴 수 없어요.”라고 고통을 호소했지만 경찰은 8분 46초 동안 놓아주지 않았다. 이후 병원으로 옮겨진 플로이드는 그날 세상을 떠났다.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미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플로이드에게 행해진 가혹행위도 문제였지만 이 사건을 처리하고 대중에게 발표하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드러났다. 병원으로 이송된 플로이드가 숨졌을 때, 경찰 측은 그가 의료사고로 사망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은 온라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의미의 ‘Black Lives Matter(BLM)’라는 문장을 해시태그로 달며 인종차별에 대해 분노했다. 학교와 공원, 거리 곳곳에 시민들이 모여 한쪽 무릎을 꿇고 다른 쪽 팔을 치켜 올리며 일제히 “Black Lives Matter.”를 외쳤다. 미국 50개 주 전역의 2,000개 이상 도시에서 크고 작은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열렸다. 경찰도 이에 동참했으며 조 바이든 전 미국 부통령과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등 지도자도 동참했다.
국내의 연대 목소리도 컸다. 6월 초 서울 명동에서는 인종차별을 규탄하고 미국 시위와 연대하는 평화 행진이 열렸다. 참가자들은 명동 밀리오레 쇼핑몰에서 청계천까지 약 1.2㎞를 걸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연대의 힘
미국 사회에 플로이드와 같은 사망 사건이 발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이처럼 대규모로, 오랫동안 이어진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시민들이 중심이 된 시위는 다양하고 의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지난 6월 초 트위터에는 흑인 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을 막아선 백인 소녀의 영상이 공개되면서 화제가 됐다. 보호대로 무장한 경찰이 진을 치고 다가오자 한 백인 소녀가 흑인 소년을 지키기 위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경찰이 몸을 일으키고 거세게 밀고 들어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흑인 소년을 지켜내 뭉클함을 자아내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행동은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힘이 된다. 우리는 수많은 역사에서 그것을 배웠고, 또 목격했다. 플로이드의 죽음이 불씨가 된 대규모 인종차별 철폐 운동으로 인해 사회 곳곳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미 항공우주국 NASA는 워싱턴DC의 본부 명칭을 메리 W. 잭슨으로 바꿨다. NASA 최초의 흑인 여성 공학자다. 페이스북은 트럼프 대통령이 플로이드 사망에 항의하는 시위자를 ‘폭도’라고 지칭하는 글을 방치해 디즈니, 삼성전자 등을 비롯한 200여 곳의 기업으로부터 광고 불매에 시달리고 있다.
짐 브리덴스틴 NASA 국장은 본부 명칭을 변경하는 결정을 내리며 “그동안 소수자라는 이유로 덜 조명 받아왔던 인물을 더 많이 기념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점을 미국이 깨닫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는 변화의 중심에 있다. 일상 속 차별에 분노하고 부당함에 저항할 때, 평범함은 위대함이 될 수 있다.
마음 속 사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마틴 루서 킹
세상에 차별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 아이라고 차별해서는 안 되며, 늙었다고 차별할 수 없다. 너무 말랐다고, 너무 뚱뚱하다고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쉬운 명제란 말인가. 문명의 발달이 세상을 빠른 속도로 편하게 하고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발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닐까? 설상가상으로 요즘은 차별이 알게 모르게 심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뚱뚱한 사람은 자기 관리를 하지 못해서 체중이 늘었으니 정신 차리라고 비난하는 것이 마치 그를 위하는 일인 것처럼 포장된다. 어떤 노동자들은 ‘너 나중에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을 들어도 공부 안하고 게으르게 살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차별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면서 자신의 차별을 정당화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지만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960년대에도 차별은 극심했다. 흑인은 백인과 같은 시설을 사용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물조차 흑인이 마시는 물을 따로 표시해두었고 ‘흑인과 개는 사절’ 같은 문구를 단 상점을 보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대중교통인 버스에서도 앞 네 줄은 백인만이 앉을 수 있었다. 1955년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이 앞자리에 앉아있다가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며 본격적인 흑인 인권 운동이 시작되었다. 문제가 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흑인들은 집단 파업과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시작했는데 이때 구성된 연합체의 의장이 마틴 루서 킹 목사다.
많은 박해가 있었지만 결국 1956년 미국 대법원은 버스의 인종 차별이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그간 마틴 루서 킹은 자택이 폭파되는 등 살해 위협을 견뎌냈고 결국 흑인 인권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그가 인권 운동의 방법으로 선택한 길은 비폭력주의였다. KKK단 같은 직접적인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같이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힘을사용하고자 했다. 동시대를 산 맬컴X는 자기방어를 위한 폭력은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방법이 효과적인지는 오늘날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을 추모하기 위한 날로 그의 생일인 1월 15일에도 특별 … 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며 본격적인 흑인 인권 운동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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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유명 흑인 인권 운동가, 알고 보니 ‘백인’ /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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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 인권 웹진
미국의 1월 세 번째 월요일은 공휴일이다.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을 추모하기 위한 날로 그의 생일인 1월 15일에도 특별 추모 행사가 열린다. 한 사람을 위한 추모의 공휴일. 그의 어떤 면이 이런 날을 만들었을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진리를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피부색이 만든 차별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지만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960년대에도 차별은 극심했다. 흑인은 백인과 같은 시설을 사용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물조차 흑인이 마시는 물을 따로 표시해두었고 ‘흑인과 개는 사절’ 같은 문구를 단 상점을 보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대중교통인 버스에서도 앞 네 줄은 백인만이 앉을 수 있었다. 1955년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이 앞자리에 앉아있다가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며 본격적인 흑인 인권 운동이 시작되었다. 문제가 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흑인들은 집단 파업과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시작했는데 이때 구성된 연합체의 의장이 마틴 루서 킹 목사다.
많은 박해가 있었지만 결국 1956년 미국 대법원은 버스의 인종 차별이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그간 마틴 루서 킹은 자택이 폭파되는 등 살해 위협을 견뎌냈고 결국 흑인 인권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그가 인권 운동의 방법으로 선택한 길은 비폭력주의였다. KKK단 같은 직접적인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같이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힘을사용하고자 했다. 동시대를 산 맬컴X는 자기방어를 위한 폭력은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방법이 효과적인지는 오늘날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아직도 유효한 꿈
지금 이 글에서 마틴 루서 킹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흑인인권운동사를 정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차별이 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이 입법 예고된 지 10년이 지났다. 아직도 통과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성적지향’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성소수자를 반대할 수 없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한다. 성소수자는 차별할 수 있도록 빼달라는 것일까?
세상에 차별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 아이라고 차별해서는 안 되며, 늙었다고 차별할 수 없다. 너무 말랐다고, 너무 뚱뚱하다고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쉬운 명제란 말인가. 문명의 발달이 세상을 빠른 속도로 편하게 하고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발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닐까? 설상가상으로 요즘은 차별이 알게 모르게 심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뚱뚱한 사람은 자기 관리를 하지 못해서 체중이 늘었으니 정신 차리라고 비난하는 것이 마치 그를 위하는 일인 것처럼 포장된다. 어떤 노동자들은 ‘너 나중에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을 들어도 공부 안하고 게으르게 살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차별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면서 자신의 차별을 정당화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진리를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이 한 구절이 반백 년이 넘은 지금 이렇게 가슴에 사무칠 일인가.
화면해설.
이 글에는 마틴 루서 킹의 조각상과 사진이 있습니다.
냉전 초기(1945-1960)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 – RISS
흑인에게 가해진 폭력 사건이나 차별적 관행들이. 해외 언론에 보도되자 사람들은 경악했고 전세계 리더의 위치에 있는 미국의 위. 선을 비판했다. 민권 운동가들은 인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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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못 쉬어요\” 절규…백인 경찰에 목 눌려 숨진 흑인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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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있는 세계사] 범죄자에서 흑인 인권 지도자로… “폭력엔 …
미국 전역에서 백인 경찰의 폭력으로 숨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흘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위는 이제 미 50주(州) 전체, 600곳이 훨씬 넘는 도시와 마을에서 열리는 사상 최대 시위로 확대되고 있다고 해요.그동안 미국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 운동을 이끈 흑인 운동가도 많았지요.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급진적인 흑인 차별 반대 운동을 펼쳤던 맬컴 엑스(Malcolm X·1925~1965)입니다. 오늘은 맬컴 엑스의 흑인 차별 반대 운동에 대해 알아볼게요.1925년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의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난 맬컴 엑스의 원래 이름은 맬컴 리틀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도교 목사이자 열렬한 ‘백투아프리카 운동'(흑인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는 운동)의 지지자였어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맬컴의 아버지는 자주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지요. ▲ 1964년 3월 26일 미국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마주친 흑인 인권 운동가 맬컴 엑스(오른쪽)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모습이에요. 동시대에 흑인 인권 운동을 펼쳤던 두 사람은 이날 처음으로 서로에게 약 1분간 인사를 나눴다고 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결국 맬컴이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자살로 처리돼 가족들은 보험금도 받지 못했고, 그의 어머니마저 신경쇠약으로 보호시설로 보내져 가족 모두 빈곤에 허덕이게 되었어요. 맬컴을 포함한 형제들은 여러 위탁 가정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1952년 가석방된 맬컴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정식으로 입단했어요. 뛰어난 연설 실력으로 많은 흑인에게 이슬람교 개종을 권유했고, 흑인들의 정신적·경제적 독립을 주장했지요. 블랙 무슬림 신문도 발행해 폭넓은 포교 활동을 했어요. 맬컴 입단 전 4곳에 불과하던 사원은 수년 만에 50여 곳으로 늘었고 신도 또한 500여 명에서 10년 만에 2만5000명으로 늘었어요. 무함마드는 이러한 맬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그를 대변인으로 임명하는 등 맬컴을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2인자로 천명했습니다. 맬컴은 평화적인 흑인 차별 반대 운동을 설파하던 마틴 루서 킹(King·1929~1968) 목사를 ‘얼간이’ ‘백인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비판했고, ‘만약 누가 나의 발을 밟으면 나도 상대방의 발을 똑같이 밟아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등 비폭력 투쟁을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10 thg 6, 2020 — 그동안 미국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 운동을 이끈 흑인 운동가도 많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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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흑인 인권운동 현장서 \”목을 짓누르지 말라\” 평화 시위 [뉴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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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있는 세계사] 범죄자에서 흑인 인권 지도자로… “폭력엔 폭력으로” 외쳤죠
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범죄자에서 흑인 인권 지도자로… “폭력엔 폭력으로” 외쳤죠 맬컴 엑스
미국 전역에서 백인 경찰의 폭력으로 숨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흘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위는 이제 미 50주(州) 전체, 600곳이 훨씬 넘는 도시와 마을에서 열리는 사상 최대 시위로 확대되고 있다고 해요.
그동안 미국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 운동을 이끈 흑인 운동가도 많았지요.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급진적인 흑인 차별 반대 운동을 펼쳤던 맬컴 엑스(Malcolm X·1925~1965)입니다. 오늘은 맬컴 엑스의 흑인 차별 반대 운동에 대해 알아볼게요.
◇백인 교사의 질타에 분노 품게 된 소년
1925년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의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난 맬컴 엑스의 원래 이름은 맬컴 리틀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도교 목사이자 열렬한 ‘백투아프리카 운동'(흑인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는 운동)의 지지자였어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맬컴의 아버지는 자주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지요.
미국 전역에서 백인 경찰의 폭력으로 숨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흘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위는 이제 미 50주(州) 전체, 600곳이 훨씬 넘는 도시와 마을에서 열리는 사상 최대 시위로 확대되고 있다고 해요.그동안 미국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 운동을 이끈 흑인 운동가도 많았지요.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급진적인 흑인 차별 반대 운동을 펼쳤던 맬컴 엑스(Malcolm X·1925~1965)입니다. 오늘은 맬컴 엑스의 흑인 차별 반대 운동에 대해 알아볼게요.1925년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의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난 맬컴 엑스의 원래 이름은 맬컴 리틀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도교 목사이자 열렬한 ‘백투아프리카 운동'(흑인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는 운동)의 지지자였어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맬컴의 아버지는 자주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지요. ▲ 1964년 3월 26일 미국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마주친 흑인 인권 운동가 맬컴 엑스(오른쪽)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모습이에요. 동시대에 흑인 인권 운동을 펼쳤던 두 사람은 이날 처음으로 서로에게 약 1분간 인사를 나눴다고 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결국 맬컴이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자살로 처리돼 가족들은 보험금도 받지 못했고, 그의 어머니마저 신경쇠약으로 보호시설로 보내져 가족 모두 빈곤에 허덕이게 되었어요. 맬컴을 포함한 형제들은 여러 위탁 가정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맬컴은 학창 시절 우수한 학업 성적으로 한때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도 가졌어요. 하지만 그를 가르치던 백인 교사에게서 돌아온 건 ‘깜둥이들은 그 주제를 알아야 한다’는 차가운 말이었죠. 이후 맬컴은 백인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보스턴과 뉴욕을 옮겨 다니며 마약 판매, 매춘 알선, 도둑질 등의 범죄로 생계를 이어갔지요. 결국 맬컴은 어느 백인 가정집을 도둑질하다 덜미를 잡혀 절도죄로 체포되었고 8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교도소 생활은 맬컴의 삶과 가치관을 완전히 뒤바꿔놓았어요. 교도소에서 많은 독서를 한 그는 통째로 책 내용을 외우다시피 하며 미국의 역사, 문화, 철학에 대한 지식을 쌓아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면회를 온 형이 ‘네이션 오브 이슬람(Nation of Islam)’으로 불리는 블랙 무슬림(백인과 흑인 분리와 흑인 우월주의를 주장하는 이슬람 조직)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어요. 맬컴은 흑인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백인을 배척하는 이 종교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지도자였던 일라이자 무함마드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고, 자신의 성인 ‘리틀’을 버리고 맬컴 엑스로 개명했습니다. 미국 흑인들의 성은 보통 그들을 노예로 부리던 백인 주인이 붙여줬다는 사실에 반발, 미지수를 뜻하는 ‘X’를 써서 흑인의 빼앗긴 뿌리를 상징하고자 한 것이었어요.
◇킹 목사의 비폭력 투쟁 비판
1952년 가석방된 맬컴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정식으로 입단했어요. 뛰어난 연설 실력으로 많은 흑인에게 이슬람교 개종을 권유했고, 흑인들의 정신적·경제적 독립을 주장했지요. 블랙 무슬림 신문도 발행해 폭넓은 포교 활동을 했어요. 맬컴 입단 전 4곳에 불과하던 사원은 수년 만에 50여 곳으로 늘었고 신도 또한 500여 명에서 10년 만에 2만5000명으로 늘었어요. 무함마드는 이러한 맬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그를 대변인으로 임명하는 등 맬컴을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2인자로 천명했습니다. 맬컴은 평화적인 흑인 차별 반대 운동을 설파하던 마틴 루서 킹(King·1929~1968) 목사를 ‘얼간이’ ‘백인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비판했고, ‘만약 누가 나의 발을 밟으면 나도 상대방의 발을 똑같이 밟아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등 비폭력 투쟁을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맬컴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1963년 맬컴이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에 대해 ‘자업자득’이라고 언론 인터뷰를 했는데, 이것이 슬픔에 빠진 미국 국민의 반감을 사게 된 것이죠. 파문이 커지자 교단에서도 그의 대변인 활동을 정지했어요.
사실 그 당시 맬컴은 교단에 갈수록 큰 실망을 느끼던 상태였습니다. 신도들에게 엄격한 생활을 강조하던 무함마드가 여성 비서들과의 사이에 여러 혼외 자식을 두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에요. 또 그는 교단이 흑인들의 시민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민감한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너무 나태하다고 보았어요. 맬컴은 교단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의 지위가 급격하게 흔들리게 되었어요.
◇흑인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다
결정적으로 맬컴은 이듬해 사우디아라비아 메카 순례에서 자신의 극단적인 태도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메카에서 만난 백인 이슬람교도들이 피부색과 상관없이 모든 이슬람교도를 반기는 것을 보고 ‘인종과 종족을 초월한 형제애’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는 정통 수니파 이슬람으로 귀의하고 이름을 ‘엘 하지 말리크 엘 샤바즈’로 바꾸며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 결별합니다. 그리고 ‘무슬림 모스크 인코퍼레이션’이라는 종교단체와 ‘아프리카계 미국통일기구’라는 정치단체를 조직해 반(反)백인주의를 넘어선 흑인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했어요. 특히 그는 ‘투표권이 아니면 총알을’이라고 연설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투표 참여도 촉구하였습니다.
하지만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교단을 배신한 맬컴을 지속적인 암살 시도로 위협했어요. 결국 1965년 2월 21일 맨해튼의 오두본 볼룸에서 청중 400명에게 연설을 하려던 맬컴은 암살자 3명이 쏜 총에 사망했습니다. 많은 사람은 맬컴이 교단에 의해 암살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범인 3명 중 2명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해 진실이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어요.
짧은 생을 살다 간 맬컴 엑스는 급진적인 행적으로 평가가 엇갈려요. 하지만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흑인 인권을 높이기 위한 운동을 펼치면서 큰 영향을 끼쳤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결국 맬컴이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자살로 처리돼 가족들은 보험금도 받지 못했고, 그의 어머니마저 신경쇠약으로 보호시설로 보내져 가족 모두 빈곤에 허덕이게 되었어요. 맬컴을 포함한 형제들은 여러 위탁 가정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맬컴은 학창 시절 우수한 학업 성적으로 한때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도 가졌어요. 하지만 그를 가르치던 백인 교사에게서 돌아온 건 ‘깜둥이들은 그 주제를 알아야 한다’는 차가운 말이었죠. 이후 맬컴은 백인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보스턴과 뉴욕을 옮겨 다니며 마약 판매, 매춘 알선, 도둑질 등의 범죄로 생계를 이어갔지요. 결국 맬컴은 어느 백인 가정집을 도둑질하다 덜미를 잡혀 절도죄로 체포되었고 8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교도소 생활은 맬컴의 삶과 가치관을 완전히 뒤바꿔놓았어요. 교도소에서 많은 독서를 한 그는 통째로 책 내용을 외우다시피 하며 미국의 역사, 문화, 철학에 대한 지식을 쌓아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면회를 온 형이 ‘네이션 오브 이슬람(Nation of Islam)’으로 불리는 블랙 무슬림(백인과 흑인 분리와 흑인 우월주의를 주장하는 이슬람 조직)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어요. 맬컴은 흑인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백인을 배척하는 이 종교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지도자였던 일라이자 무함마드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고, 자신의 성인 ‘리틀’을 버리고 맬컴 엑스로 개명했습니다. 미국 흑인들의 성은 보통 그들을 노예로 부리던 백인 주인이 붙여줬다는 사실에 반발, 미지수를 뜻하는 ‘X’를 써서 흑인의 빼앗긴 뿌리를 상징하고자 한 것이었어요.1952년 가석방된 맬컴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정식으로 입단했어요. 뛰어난 연설 실력으로 많은 흑인에게 이슬람교 개종을 권유했고, 흑인들의 정신적·경제적 독립을 주장했지요. 블랙 무슬림 신문도 발행해 폭넓은 포교 활동을 했어요. 맬컴 입단 전 4곳에 불과하던 사원은 수년 만에 50여 곳으로 늘었고 신도 또한 500여 명에서 10년 만에 2만5000명으로 늘었어요. 무함마드는 이러한 맬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그를 대변인으로 임명하는 등 맬컴을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2인자로 천명했습니다. 맬컴은 평화적인 흑인 차별 반대 운동을 설파하던 마틴 루서 킹(King·1929~1968) 목사를 ‘얼간이’ ‘백인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비판했고, ‘만약 누가 나의 발을 밟으면 나도 상대방의 발을 똑같이 밟아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등 비폭력 투쟁을 강하게 부정했습니다.하지만 맬컴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1963년 맬컴이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에 대해 ‘자업자득’이라고 언론 인터뷰를 했는데, 이것이 슬픔에 빠진 미국 국민의 반감을 사게 된 것이죠. 파문이 커지자 교단에서도 그의 대변인 활동을 정지했어요.사실 그 당시 맬컴은 교단에 갈수록 큰 실망을 느끼던 상태였습니다. 신도들에게 엄격한 생활을 강조하던 무함마드가 여성 비서들과의 사이에 여러 혼외 자식을 두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에요. 또 그는 교단이 흑인들의 시민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민감한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너무 나태하다고 보았어요. 맬컴은 교단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의 지위가 급격하게 흔들리게 되었어요.결정적으로 맬컴은 이듬해 사우디아라비아 메카 순례에서 자신의 극단적인 태도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메카에서 만난 백인 이슬람교도들이 피부색과 상관없이 모든 이슬람교도를 반기는 것을 보고 ‘인종과 종족을 초월한 형제애’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는 정통 수니파 이슬람으로 귀의하고 이름을 ‘엘 하지 말리크 엘 샤바즈’로 바꾸며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 결별합니다. 그리고 ‘무슬림 모스크 인코퍼레이션’이라는 종교단체와 ‘아프리카계 미국통일기구’라는 정치단체를 조직해 반(反)백인주의를 넘어선 흑인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했어요. 특히 그는 ‘투표권이 아니면 총알을’이라고 연설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투표 참여도 촉구하였습니다.하지만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교단을 배신한 맬컴을 지속적인 암살 시도로 위협했어요. 결국 1965년 2월 21일 맨해튼의 오두본 볼룸에서 청중 400명에게 연설을 하려던 맬컴은 암살자 3명이 쏜 총에 사망했습니다. 많은 사람은 맬컴이 교단에 의해 암살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범인 3명 중 2명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해 진실이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어요.짧은 생을 살다 간 맬컴 엑스는 급진적인 행적으로 평가가 엇갈려요. 하지만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흑인 인권을 높이기 위한 운동을 펼치면서 큰 영향을 끼쳤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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